2019년 4월 29일 월요일, 흐림
서울집 마당 대추나무는 볼품없이 가는 가지에 새싹을 올리려다 요즘 추위에 주춤하고 있다. 서울집에도 옛적에는 동쪽 담장으로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어 매해 두세 말 대추를 수확해서 남도 줘가며 양껏 먹었는데 어느 핸가 대추의 암(癌)이라고 하는 ‘미친병’(점잖게 ‘빗자루병’이라고 부른다)이 우리 동네 대추나무를 훑고 지나갔다. 겨울 새벽에 ‘서리의 여왕’이 긴 망토를 끌며 지나가면 모든 생명이 하얀 서리를 쓰고 얼어붙듯, 어느 집에서 시작한지 모를 병이 집집의 대추나무를 쓰러뜨렸고 우리 대추도 그렇게 병들어 시들었고 톱으로 베어져 불태워졌다.
그래도 그 대추에 대한 우정을 잊을 수 없어 회초리만한 나무를 사서 서양볕에 바알갛게 익으라고 서울집 서쪽 담장 밑에 심었다. 그렇게 심은 게 5년, 아직 대추 구경은 못했지만 오늘 다시 가지치기를 해주었다. 염치가 있으면 올해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징표로 대추 두어 개라도 열어 주련만… 정원 도장나무도 울타리와 어울리게 각을 잡아 전지해주고 옥잠화, 윤판나물, 은방울꽃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다보니 오전이 다갔다.
늦잠을 자고서 11시에나 아침을 먹은 참이라 점심은 생략하기로 했는데 3시가 되니 보스코가 뭘 좀 먹잔다. 어제 남은 음식을 잘게 썰어서 모두 쓸어넣고 볶았다. 예전엔 ‘꿀꿀이죽’이 있어 ‘미군 군화 바닥에 징만 빼고’ 몽땅 솥에 함께 넣어 푹푹 끓여 한 그릇씩 끌어안고 먹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음식 풍속도 달라져 모든 음식을 철판에 볶아서 내놓는다. 팍팍 끓이느니 철판 위에 지글지글 볶는 게 어쩐지 더 선진적이고 있어보여선지 보스코는 꿀꿀이죽은 안 먹지만 볶음밥은 즐겨 먹는다.
호천네서 밀가루 미는 기계를 빌려와 라사냐를 만들었으니 돌려주는 일이 남았다. 비록 내가 사준 기계지만, 남에게 남겨진 내 물건은 나 역시 마음이 쓰이는지라, 빨리 돌려주고 싶어 북가좌동엘 가겠다니까, 보스코도 용산에서 몇몇 사제들과 모임을 갖는다며 데려다 주고 가란다. 멀리 도는 길임에 틀림없는데 너무 매정하게 싫다 하면 부부간에 정떨어질까봐 그러마고 했다. 더구나 호천네 이웃에 이엘리 딸네 집이 있어 오늘 들르겠다고 해둔 참이다.
어제도 어지간히 힘들어 보이는 나에게 이엘리가 자기 손녀딸 윤서의 사진을 보여주며 “선생님, 사진 보세요. 나는 힘들면 얘가 약이예요. 힘이 쪽 빠졌다가도 얘 사진을 보면 힘이 나요”라고 나를 웃겼는데, 옆 사람 병에 자기 먹는 약봉지를 내미는 격이다. 난 내 손주 봐야 기운이 날 텐데 말이다.
한목사더러 함께 가자고 했다,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사인방에게 소문난 이엘리 손녀딸 구경도 할 겸. 과연 호천네와는 1.4km 떨어진 이웃동네였다. 아가는 정말 사랑스럽고 온 식구의 눈길 손길을 독점하고, 엘리의 두 딸은 보기에도 든든했다.
저녁으로 회초밥을 대접받아 먹고 있는데 윤서가 눈물 콧물 흘리며 용을 쓰더니 크게 이바지를 했다. 일이 터지자 애엄마와 이모는 밥먹다 말고 옆방에서 치우는 공사를 했다. 저 조그만 생명이 어른 셋을 시도때도 없이 꼼짝 못하게 부려먹다니…. 타골이 읊은 「초승달」의 시 한수(“마지막 흥정”)가 떠올랐다.
“누가 나를 부리시오!” 돌 깔린 길을 걸어가며 내가 소리쳤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임금님이 수레를 타고 오셨습니다.
“내가 권력으로 너를 부리겠다.” 그러나 임금님 권력도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한 노인이 황금 자루를 메고 왔습니다.
“내 이 돈으로 당신을 부리겠소.”
그는 은전을 셌지만 나는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미소로써 당신을 부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니의 웃음은 이윽고 눈물로 변했습니다.
해가 모래밭 위에 반짝거립니다.
어린이가 조개껍질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머리를 들고는 나를 아는 체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거저 당신을 부리겠습니다.”
그렇게 어린이 장난에서 맺어진 흥정이 나를 자유의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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