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맑음
‘지난번 심고 간 으아리가 어찌 됐을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물을 좀 주라’고 총각들에게 부탁을 하고 갔기에 지금쯤 뿌리를 내려 자리잡고 줄기를 뻗고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으아리 두 포기는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내게는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 외의 상황일수도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그래, 좋게만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올라오는 길에 ‘쓸모의 발견’ 꼬마책방 앞에 화분이 다 치워지고 ‘잠시(2주간) 문을 닫는다’는 방이 붙어 있다. 그래도 바람벽에 기대어 한참 꽃을 피우는 들양귀비가 보여 ‘주인이 없으니 목마르겠구나. 내일은 내가 물을 한 통 갖다 먹여주마’ 일러주고 온 길이다.
어젯밤에 명동행사를 마치고 엄엘리 차로 돌아오던 길. 한목사는 조수석에 앉고 나더러 뒷좌석에서 눈을 좀 붙이라는 착한 친구들의 배려에 나는 아예 뒷좌석에 길게 누웠다. ‘엘리야!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단다. 서서 가기도 힘들만큼 피곤한 날, 지하철 좌석 3개를 독차지하고 길게 누워 편안하게 수유역까지 가보고 싶은 거였어’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선생님! ‘좌파 전직대사부인 지하철에서 추태!’ ‘봐라, 봐! 빨갱이들의 실체를!’ 이라고 인터넷에 도배될 겝니다” 라는 엘리의 충간. 암튼 ‘작은딸내미’ 자가용에서지만 명동에서 우이동까지 드러누워 오며 최고로 행복했다.
우리 두 아들이 어려서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관광지를 걷느라 지치고, 차 안에서는 형제가 노느라 바빴던 터라, 그 좁다란 뒷자석에서 두 아이가 엉켜 자는 모습을 백밀러로 바라보노라면 나도 운전대를 놓고 둘 사이에 끼어 잠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 같았던지!
그러니 숨쉬기도 힘들만큼 빡빡한 지하철로 오가다 보면 삶에 지친 군상들의 힘든 모습에 도시의 생활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지리산이라는 대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어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새삼 절감한다. 그걸 사람들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물론 쉽지 않으리라
보스코는 10시에 CCK에 회의하러 갔다가 잠실 롯데월드로 가기로 하고, 나는 12시에 맞추어 직접 그곳으로 갔다. 얼마 전 그 높다란 롯데 빌딩을 보고 스카이라운지에 한번은 가보고 싶다니까 보스코 말이 ‘내 돈 내고 그걸 보겠다고 가지는 않지, 혹시 누가 보여주면 모를까’ 라고 대꾸했는데 바로 그 누가 이은씨다. 막내 훈이서방님 동기로 고등학교 시절 보스코에게 배운 처지다. 101층까지는 아니더라도 훈이서방님이랑 31층 서민풍으로 점심을 하자는 초대였다.
31층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서울에는, 특히 강남에는 아래서 보던 것보다 높은 마천루들이 훨씬 많다. 옆으로옆으로 손을 뻗어야 어루만져지는 인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위로위로 딛고 올라가야 한다는 인간의 욕심과 오만의 바벨탑! 저런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법과 암거래가 오갔을까 하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에 그저 찬탄만을 할 수는 없었다.
고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거기서 내려다보는 인간은 땅바닥을 기는 미물이나 한 개의 점으로 보일 뿐, 귀하다든가 아름답다든가 하는 존엄성을 살피기엔 현실감이 떨어져갈 수밖에! 세상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욕심으로만 얼룩져 누군가를 구경삼아 동반할 일이 아니면 다시는 안 올 곳이다.
보스코는 먼저 집으로 가고 나는 강남역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나니 퇴근시간. 땅속으로만 기어 다니고 태양을 보면 눈이 머는 두더지의 생활, 눈이 먼 채로 밀리고 밀리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이 뜨거운 슬픔에는 정체도 없고 가해자도 없다. 우리 모두 서로서로 피해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전철에서 내려 시장에서 김칫거리를 사서 들고 끙끙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나타난 백마의 기사! 오빠는 백마 대신 하얀 자전거를 타고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무거운 내 짐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었다. 비록 ‘태그끼아재’여도 역시 오빠는 오빠여서 언젠가 보았던 금융광고 ‘오빠, 무겁지 않아?’ 하던 응석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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