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5일 목요일, 흐림
어젯밤 여수에서 온 생선회가 내 위장에서 사고를 쳤다. 대부분이 멀쩡한데 어쩌다 재수 없는 사람은 한 조각의 회에 심한 바이러스 감염으로 간이 완전히 파괴되어 24시간 안에도 죽는다니 배탈정도는 애교로 봐줘야 한다. ‘태제 기도’ 후 내놓은 푸짐한 횟감을 몇 점 먹었는데 그게 오늘 하루 종일 단식을 해야 할 만큼 심한 설사를 초래할 줄이야.
내가 해 주는 음식이라면 사시사철 맛있게 먹고 탈나는 일이 좀처럼 없는 보스코는 자기 위장을 보호하는 특별한 방어기제가 있나보다. 어떤 것을 먹을지 말지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 후 대처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음식을 먹고 와서 탈나는 일이 없다.
우리 동네가 남동쪽으로 앉아 있어 ‘허준의 왕산’이 마주보여 동의보감촌이 그 아래 있다. ‘서당개 3년’이라고 이런 때는 굶거나 매실청을 자주 먹어 장청소로 살균작용을 한다니 우리 휴천재 앞뒤로 가득한 나무가 바로 매실나무다. 매해 담근 매실이 이럴 때는 효자다.
오늘은 ‘8.15 광복절’에다 ‘성모 승천대축일’. 공소식구를 몇 차에 나눠싣고 성당엘 갔다. 내 차에는 마르타, 안젤라, 리디아 아줌마가 탔다. 마르타 아줌마는 안젤라와 리디아에 밀려 꿀 먹은 벙어리고 두 아짐은 입을 쉬지 않고 놀린다.
‘어제 중촌댁 영감 제삿날이었다고, 밥을 준다더니 마을회관에 과일만 가져 왔더라고, 이건 틀림없이 며느리 짓이 아니고 딸이 한 일 같다고(우리 친정에서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며느리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악역은 딸이 맡아야 집안에 분란이 없다, 예를 들어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는), 그런데 그 집에 오후에 일이 터졌다고, 큰사위 작은사위가 '처갓집 벌초'를 하다 막판에 커다란 땅벌집을 건드려 그만 두 사위가 벌집이 되고 말았다고, 수십 방의 벌침을 맞고 평상에 쓰러져있는 장정 둘을 가까운 유림병원으로 싣고 가 응급처치를 하고 집이 있는 마산으로 실어갔다고….’ 함양 가는 20여분 찻길에 스토리가 다 나왔다.
그런데 시비를 가리는 얘기에서 여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그 정신에도 전빵집 돼지 주라고 돼지먹이를 갖다 주고 떠났다고, (제사 지낸 집에서) 사람 먹을 건 안 주고 쓰레기만 주고 갔다는 말이 나왔다고, 그 오해를 풀자고 안젤라가 제삿집 사정을 동네사람들한테 얘기하자니 미사시간도 못 댈 것 같아 암말도 못하고 왔다고, 서로가 속사정을 얘기 안 하면 오해하기 딱 좋은 게 인간사라고, 그래도 바빠서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는 음식을 돼지한테라도 먹이라고 들고 온 정성은 좋게 생각해 줘야한다고’ 하는 결론! 성당 가는 아짐들로서 훌륭한 결론이었다!
미사 후에는 오늘이 대축일이라 공소회장이 공소식구 전부를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먹였다. 우리 어린 시절 짜장면은 졸업식 날이나 한그릇 얻어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는데, 성모승천대축일의 특식을 나는 배탈로 바라보고만 있는 가엾은 처지였다. 흡족해하는 아줌마들 얼굴에서 우리가 아직도 머물러 있는 지점인 듯하여 짠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오늘 8.15를 맞아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우리 대통령. 우리가 갖잖은 왜놈들에게 홀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울컥! 식당의 손님들도 이번엔 물러섬 없이 끝까지 싸워야겠다는 다짐을 보인다.
저녁식사 후 강가로 산보를 나갔다. 다른 때면 아직 뜨거운 공기가 훅 달려들고 모기가 극성인데 오늘은 제법 선선하여 올여름 들어 처음 저녁산보를 나선 셈이다. 드물댁도 산보 나왔다가 반갑게 웃는다.
다리께 와룡대에서 오늘 처음 만난 중촌댁 큰아들이라는 사람을 만나 보스코가 말을 걸었다. 그도 보스코가 누군질 알아보고 (연전에 동네사람이 강가에 공장을 만드는 일을 우리가 반대해서 유감이 있었나보다) 얘기가 길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보스코가 자꾸만 이 동네 역사를 캐물으니까 김길동 이장의 영웅담을 들려 주느라 본심을 얘기 못하고 옛날 옛적 얘기에 신이 났다. 왕년에 한 주먹 했음도 은근히 내비치는 가운데 정작 하고픈 본론을 잊어버리는 품을 보아도, 남자들이란 도대체 모노풍셔날인가 보다. 동네 역사를 그 사람에게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보스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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