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사흘쯤 더 걸으면 도쿄시내로 들어간다. 그 무렵 국회에 전달할 서간문집의 타이틀을 쓰고, 이를 담을 USB의 상자도 추천받았다.
요코하마로 가는 도중에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니, 한국탈핵에너지학회의 고문이신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명예교수가 오염수 과학논쟁에 대해 일갈한다.
문장중 주목되는 대목은,
"오늘의 물질문명이 지닌 부산물로 인해 설혹 우리가 최선을 다해 방어하려해도 우리의 바다는 불가피하게 오염되고 있다. 그렇기에 만일 가능하다면 이미 방류된 오염물질이라도 이를 거두어들여 따로 처리해야 할 마당에, 아직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은 오염물질을 고의로 바다에 집어넣는 것은 지구의 생명을 죽이려하는 극도의 범법행위에 해당한다."
함께 걷는 일본의 동지들은 애를 쓰고 있지만, 핵오염수 문제에 대체로 침묵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분위기를 겪다 보니, 평생을 민주주의 구현에 바친 고 김대중대통령이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남긴 말이 생각난다.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이 대목이다. 혼자 담벼락에 대고 욕을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을 입밖으로 소리를 내는 것, 쉬우면서도 어렵다. 소리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사건이다. 소리가 되돌아서 자신의 귀에 들려온다. 생소하다. 그러므로 혼자일지라도 소리를 낸다는 것은 경계를 넘는 것이다. 애초에 그 경계를 넘어 생각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마치 추운 겨울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먼저 발을 담그고 몸에 신호를 보낸 다음 결국에는 몸을 담그지 않는가.
한번 담벼락에 대고 소리내어 나쁜 권력에 대한 욕을 해보는 경험을 하면 그 다음은 쉽다. 이젠 소리대신 문자로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발신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답신은 할 수 있다. 그러면 소통의 바다가 열리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바로 소통에 있다. 김 전대통령의 담벼락론은 씹을수록 맛이 있다. 이 대목에서, 원전의 위험에 대한 시민의 무관심을 경계하는 필자의 예전글이 생각난다. 여기에 소개한다.
교차점에서 신호를 대기할 때면 일행과 함께 외친다.
'호사노 오센스이오 우미니 나가스나(「放射能汚染水を海に流すな!」)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마)
호사노 오센스이오 우미니 스테루나(「放射能汚染水を海に捨てるな!」)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마)
코도모가 아부나이 오센스이오 나가스나'(「子供たちが危ない。汚染水を流すな!」)
(아이들이 위험하다, 오염수를 버리지마)
시민들은 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호응의 눈빛을 보여준다.
출발해서 얼마되지 않아 시나가와역에 도착했다. 많은 동지들이 환영해주신다. 필자는 역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아이들이 위험하다. 우리모두 부모이거나 할아버지할머니다. 반드시 오염수방출을 중지시켜야 한다." 는 요지의 발언을 큰 소리로 외쳤다.
광장 한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즉석 설문조사를 보니, 도쿄 시나가와역에서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 마라!'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음다. 이 결과는 그동안 일본 언론이 발표한 여론조사결과와는 전혀 딴판이다. 우리는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
한국의 원전엔지니어로서, 필자가 대표로 있는 원전위험공익정보센터의 정책위원도 겸임하고 있는 이정윤 선생이 이 무렵 실감나는 진단을 하였다. 이를 소개한다.
일부를 소개하면, "지난 8월 18일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기시다 총리는 일주일도 안 된 8월 24일 후쿠시마 핵폐수 투기를 자행했다. 1996년 핵폐기물의 해양투기를 금지한 런던협약 이후 역사적으로 초유의 일이다. 곧바로 미 국무성 토니 블링컨 장관과 백악관의 커트 캠벨의 지지선언이 나왔다. 이는 미국과 긴밀한 사전 논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핵폐수 해양투기가 국제법적으로 불법임은 자명하다. 애초부터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세운 국제안전기준에 합당하게 배출한다는 것은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IAEA의 독립적이고 과학적이며 안전하고 투명한 절차는 없었다. 지난 7월 4일 일본에 제출한 IAEA 보고서는 일본이 제시한 자료에 대한 검증은 없었다. 정치외교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정략이 있었을 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1996년에 일본정부가 러시아의 방사성폐기물 행양투기에 분노하여 만든 런던의정서가 2006년에 발효되었고 2007년에는 일본도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나무위키에 소개되고 있는 이 대목을 살펴보면,
"1993년 러시아 해군의 방사성 폐기물 투기 전용선이 자국의 액체성 방사성폐기물 약 900t을 블라디보스토크 남동쪽 190㎞ 지점 동해상에 버렸다가 발각되었을 당시 일본이 크게 분노하였고, 러시아와 일본은 1972년 '런던협약'에 가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유리한 입장에서 공세를 지속하였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방사성 폐기물 방류는 이웃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양국이 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대통령이 일본을 떠난 다음 날, 러시아는 비밀리에 또 한 번 핵폐기물 방류를 하다 잠복 중이던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적발되어 일본은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고 반러감정이 심화됐다. 그래서 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해상폐기물에 대해 보다 강력한 규제를 만들었고 1993년 런던협약 개정안에서는 부속서를 개정하여 모든 핵폐기물의 해양투기를 전면 금지했다. 1996년 개정의정서는 런던협약을 전면적으로 개정하여 폐기물의 해양투기 금지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투기를 허용하도록 조항을 바꿨다."
이 분야 전문가인 홍기훈박사(한국해양연구원)의 지적에 따르면 이 런던의정서는, 유엔의 국제해양법협약 제210조에 규정되어 있는 '해양투기에 관한 국제규범'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 어기는 것은 범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적반하장 격으로 일본정부가 앞장서서 러시아를 능가하는 환경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문제는 이에 대한 제재의 방안이 미약하다는 것.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힘의 논리가 국제사회에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명문화한 조약만 있고, 범칙에 대한 제재가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이래서는 하나밖에 없는 지구가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지구를 후손에게 빌려쓰고 있다. 이대로는 망한다. 가만히 놔두면 자본권력이 자신의 속성대로 약탈적 행태를 반복할 뿐이다. 응징해야 한다. 주제파악이 안되는 이들에게 벌칙으로 제재하는 장치는 최소한의 생존조건이다.
강건너 언덕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흐르는 강물에 휩쓸려 간다. 부처님의 '가자 가자 함께 가자 저 언덕으로' 라는 뜻의 반야심경 후렴구에는, 아무런 애를 쓰지 않고는 그 언덕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도 깃들어 있다. 삶의 안팎으로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한다. 노를 젓는 것, 그게 인류의 숙명이다.
드디어 신바시역이다. 무더운 여름, 1600km 여정의 종착지다. 감개무량하면서도 덤덤한 기분이다. 도착하기 전에는 이 먼 거리를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막연했지만, 이렇게 도착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서로 소감을 말하는 시간도 가진다. 필자는 그동안 동지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이제 마지막날인 9월 11일 내일은 일본국회로 향하는 시간이다.
국토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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