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목요일(2024.9.12.) : 1코린 8,1-13; 루카 6,27-38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둠 속에 싸여 있습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무도한 정치 세력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받고 있는 하느님의 빛을 최대한 비추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빛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듣고 있는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힘겹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있는 힘껏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뜻이며 또한 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의 뜻을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것을 고백이라 하며, 그 뜻에 따라서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는 힘을 증거라 합니다.
사랑의 힘에는 최대한이 있고 최소한이 있습니다.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주는 상대방에게는 최대한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대하고자 하고 우리가 선택했으며 또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그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그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이나 일생을 바칠 수도 있는 정도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렇듯이 최대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 수는 없지만, 단 둘이나 셋이라도 그래서 아주 작은 범위의 인간관계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고 그 관계에서 모아진 뜻과 증거를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드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러한 인간관계가 이룩하는 연대와 통공의 네크워크가 결국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공의회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공동체’라 불렀으며, 교회는 이러한 인간관계들의 총합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교회를 인간 공동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반포한 최종 문서인 사목헌장의 제1부 제1장의 제목이 ‘인간의 존엄성’이고, 제2장의 제목이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 제2장의 28항에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근거가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이는 우리를 반대하고 심지어 박해하기까지 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우리의 정체성인 사랑의 뜻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최소한도로라도 발휘해야 하는 일종의 방어적 전술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폭력이나 악에 대해서 절대로 우리가 물들어서 대항폭력으로 맞서거나 또는 굴복해서 그 폭력과 악을 키우지 말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원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뜨거운 감자처럼 결코 쉽지 않는 논란이 그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 말씀을 가장 정확하고 안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처신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반대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로마 총독의 권세를 이용하고 혁명당원들과도 야합하여 군중을 선동해서 당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할 때, 구차하게 논쟁을 벌이시지 않고 침묵하시며 당신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저주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도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몰라서 짓는 죄이니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탄원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죽음이 사랑의 최소한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방어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순순히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박해가 닥치면 일단 피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마태 10,23 참조). 또한 더 이상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박해자들이 저지르는 악이 더 커져서 더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당방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마태 10,34)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기희생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후퇴하거나 저항하는 선택은 사랑의 최소한에 있어서 최소한의 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가 압제적인 정치로 기본권을 말살하고 공동선을 파괴하는 경우 국민이 봉기하는 혁명이나 자본가가 착취하거나 경영자가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 이에 대해 항의하는 파업,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저항권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헌법에 보장되게 된 배경도 이에 근거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해 주는 것이 사랑의 최대한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가 하지 않는 것도 사랑의 최소한입니다. 최대한이든 최소한이든 사랑을 증거함에 있어서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최선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황금율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는 우리도 고백이든 증거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서도 방어 전술이 달라집니다. 희생당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으며,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방어하는 선택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즉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과 선택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며, 상대방의 폭력이나 악 때문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선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신교 풍습에 물들어 우상을 숭배하고 있던 당시 코린토인들에게 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이 권고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부도덕한 자본이나 불의한 권력도 대단한 실체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진리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사랑의 진리를 고백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가로막을 수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가하려는 악한 힘이 우리네 정체성을 해칠 수는 없고, 오히려 희생이든 후퇴든 저항이든지 간에 믿음이 고백과 증거로 나타나는 방어적 선택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빛납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빛나는 별처럼 빛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