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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하느님 뜻대로 사람들의 문제 푸는 일 [이신부의 세·빛] 작은 이들의 수호천사들 이기우 2024-10-02 10: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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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천사 기념일(2024.10.2.) : 탈출 23,20-23; 마태 18,1-5.10


전교성월의 둘째 날인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아마 제자들은 베드로에게만 수제자 자리를 정해주지 말고(마태 16,18-19 참조) 자신들도 서열을 정해달라는 지청구를 해댄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어린이’란 모든 것이 부족한 작은 이들로서, 가난한 이들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 작은 이들 사이를 수호천사들이 오르내리며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호천사라 하면 날개 달린 존재를 연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수호천사란 말 그대로 우리를 지켜주고 또 도와주면서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일꾼을 말합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수호천사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만,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마태 18,10), 가난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우선적인 관심 대상인 만큼 그들에게는 특별한 수호천사들이 파견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독재와 가난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예외 없이 한국의 작은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네 분만 소개합니다.


먼저,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la Mulherin, 1900~1993) 수녀는 메리놀 수녀회 소속으로 1926년에 한국에 파견되어 1960년에 부산에서 성가신협을 설립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펼친 선구자입니다. 6.25 전쟁 직후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돕느라고 애썼지만 그들의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을 보고, 57세의 나이로 캐나다로 건너가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 부설 협동연구원에서 협동조합운동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돌아와서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가톨릭구제회의 직원들과 부산 중앙본당 신자들 가운데 27명과 함께 성가신용협동조합을 국내 최초로 설립했습니다. 그는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할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일보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신협을 만드는 일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1928~2018) 신부는 1954년에 제주에 도착해서 55년 동안 이시돌 목장을 비롯하여 4H클럽, 성이시돌 병원, 양로원, 호스피스 병원, 청소년센터, 유치원 등을 모두 협동조합 방식으로 설립했습니다. 4.3항쟁과 6.25전쟁이 훑고 지나간 제주에서 그가 본 제주 사람들은 정직하고 교육열이 높지만 제주라는 섬은 지독히도 가난한 땅이었습니다.


한 달에 4~5%짜리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 근근이 살다 자포자기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곗돈을 떼여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무담보신용대출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부산으로 돈 벌러 갔던 아낙이 물통에 빠져 한 줌 재로 돌아온 일에 가슴을 친 그는 제주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요량으로 ‘한림수직’을 시작하여 천3백여 명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목축업이 번성했던 아일랜드에서 자란 그는 제주도의 중산간지대가 고향과 기후가 비슷한 것을 알아보고 나서는 농민들에게 목초지 개간법과 가축 기르는 법을 가르치고, 4H클럽을 조직하여 교육을 받은 회원들에게 조건 없이 돼지와 병아리를 분양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금에 와서는 가난했던 제주 사람들에게 그는 희망을 선사한 천사가 되었고, 제주 사람들은 그에게 ‘제주도 근대화의 선구자’라는 존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1959년에 입국한 네덜란드 출신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Didier t'Serstevens, 1931~2019)는 처음부터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임실본당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고 산양의 젖으로 치즈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1967년에 벨기에에 거주하던 부모로부터 받은 2천 달라를 밑천으로 한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치즈를 생산하는 과정은 쉽지 않아서, 동료 농민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 공장들을 견학하면서 치즈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마침내 1969년에 최초의 치즈 생산에 성공했습니다. 유통망이 전국에 확장되면서 그는 임실 치즈 공장을 주민 협동조합으로 개편하고 운영권과 소유권을 주민 협동조합에 양도해 주었습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파견된 존 데일리(John Vincent Daly, 1935~2014) 신부는 1970년대에 서강대 교수로 지내던 중 학생들이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는 것을 보고 사회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도처에서 개발붐이 일어나서 비참하게 밀려나던 철거민들의 삶을 목격하고 청계천과 양평동, 상계동,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들의 동지이자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정구 바오로와 함께 경기도 시흥시 신천리에 복음자리 마을을 만들어 철거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권리, 특히 주거권에 관한 의식을 한국 사회와 교회에 일깨워준 그가 서울대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설립하도록 건의한 장본인이며, 저의 선임자이기도 합니다. 귀화한 한국 이름이 정일우입니다.


선교는 종교의 교리를 전하여 신자로 만드는 일 이전에,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들의 문제를 푸는 일입니다. 위에 소개해 드린 선교사들은 한국의 가난한 이들이 처한 빈곤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준 은인들입니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이하여 한국에 파견되어 스스로 가난한 이들의 수호천사가 되신 이 선교사들에게 감사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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