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2025. 04. 24) : 사도 3,11-26; 루카 24,35-48
우리네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서 발현 체험이라든가 현존 체험은 낯선 일입니다. 보통의 신자들은 기복적인 신앙의 테두리에서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생활에서 소망스런 일들이 벌어지면 축복이라 여기고, 뜻하지 않게 벌어진 재난에서 구해지면 은총이라 여기는 그런 정도에서 살아갑니다. 또는 양심에 따라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다운 태도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의 은총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을 만나야 하고, 그분의 발현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분의 현존을 느껴야 합니다. 지난 21일에 88세로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도 전 세계인들에게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 준 분입니다.
2013년에 교황직에 선출된 이래 12년 동안, 소탈하고 청빈하게 살면서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2014년에 방한하여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리고 한국교회에 쓴 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진정성 있게 교회의 쇄신을 촉구하는 한편,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염원하던 그분의 소원이 북한 정권의 소극적 태도로 무산되었던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발현하셔서 희망을 부어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삼 년 동안이나 그분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또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배운 그들이, 더구나 수난과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고까지도 세 차례나 들었던 그들이, 막상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는 체험을 하니까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다른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믿지 않고 헛소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만큼 죽은 이의 부활은 전무후무한 일이라서 기억에도 없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라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 출신 제자들 앞에 어부 모습으로나타나셨습니다. 그네들은 스승의 죽음에 매우 실망하여 소명을 포기하고 출가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가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상황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상황과 똑같았습니다.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눈치를 보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부활하신 그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님을 입증해 보여주시려는 행동이었습니다. 부활한 존재는 영적인 몸이라는 뜻입니다만, 이 영적인 몸은 육신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시공을 이동할 수 있으며, 순전히 영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서 사람들 앞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음식까지 먹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 존재의 활약상을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이 들려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주는 기적을 행한 바 있었고, 그 기적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발현체험과 현존체험은 서로 통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천상의 일에만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땅의 일에도 관심을 두시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통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증인이 된 사도들은 부활의 기운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한 몸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하느님의 힘을 받지는 못했는데,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는 기적까지 행사했다는 데에서 예언자들을 능가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또 세상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사도직 활동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현존의식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때, 이미 우리도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입니다.
현존 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 기운은 발현 체험에서 나옵니다. 사도들과 우리 사이에 공통적인 점은 자기 자신의 길을 기꺼이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만한 인생 전환의 동기가 유발된다는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그 발현 체험이 카리스마적인가 혹은 가치적인가에 있습니다. 생전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손수. 가르치셨으며,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사명을 주셨던 제자 출신 사도들이 받은 카리스마는 반복될 수 없는. 영적인 기운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 가운데 그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그들의 발현 체험은 카리스마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또 그 사도들의 후계자들과 성인 성녀들과 무수한 순교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분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을 믿는 길이며 진리의 길임을 확신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 뵈옵는 체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그분은 성령으로 시공을 넘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적인 발현 체험으로는 아니지만 가치적으로, 즉 그분의 삶을 따르려는 복음 삼덕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이 가치를 실현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서원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분을 만납니다.
그분의 영을 체험하는 데 아무런 우열의 차이 없이 우리는 초대받고 있고, 결과적으로 뜨거운 현존 체험과 깊은 현존 의식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발현 체험은 카리스마적이라기보다 가치적이고, 복음 삼덕의 가치를 서원함으로써 보편화될 수 있어서 성직자와 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이며, 그 가운데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서원이라는 제도를 거친다는 점에서 제도적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카리스마적 발현 체험을 한 사도들처럼, 가치적이고 문화적이며 제도적인 발현 체험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발현 체험으로 인한 현존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하시고, 우리들이 현존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얼마든지 사도직 활동에서 기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우리가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일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발현과 현존의 힘이 기적이기 때문이고, 믿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믿는 일 자체가 또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의 삶이 기적입니다. 발현과 현존의 체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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