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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강하고 굳건한 희망의 증인 [이신부의 세·빛]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이기우 2025-11-14 19: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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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2025.11.16) : 말라 3,19-20; 2테살 3,7-12; 루카 21,5-19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막바지에 달한 연중 제33주간으로서 이제 다음 주일에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지내고 나면 대림시기로 접어드는 12월부터는 새로운 전례 주년이 시작됩니다. 지난 2016년에 자비의 희년을 지내도록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한 바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희년을 마치면서 그 정신을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매년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향과 일치하여, 그 희년에 반포된 회칙 「자비의 얼굴」을 간추려 소개해 드림으로써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에페 2,4)의 눈으로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로서,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야 할 근본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온전히 드러내라는 임무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행하신 모든 기적은 자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은 우리도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가 자비에 대하여 잊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새로운 열정과 사목 활동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거듭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가 주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자비로운 육체적 활동뿐만 아니라,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자비로운 영적 활동에 가톨릭 신자들이 나서기를 바랍니다.


자비의 해는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천명하셨던 사명을 다시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라는 뜻이고 바리사이들의 정의는 율법을 준수하라는 뜻이지만,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성경 상의 정의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의롭게 행한 이들을 받아들여주고,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며 이를 자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비는 용서의 두 가지 차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이며, 그 벌 역시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마음에서 부여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자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 맡기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믿는 이의 삶 전체에 이르고, 폭력과 차별로 죄를 저지르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이른다는 확신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비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상 회칙 「자비의 얼굴」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해 드렸습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가 그분을 믿는 이들에 의하여 실천되는 바로 그 날을 예언자의 눈으로 마치 환시처럼 보고 전해주었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말라 3,19)


말라키의 이 환시는 물리적인 현상을 묘사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물리적인 차원에서 자비를 거스르는 모든 힘과 악인들을 화덕에 불태워버리듯이, 영적으로 자비의 기운이 사회적으로 압도하게 될 것임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표현입니다. 우리 사회 현실에서 자비는 복지로 실현되고 있는데 복지가 확대되어 실현되어가고 있는 추세가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을 실감케 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복지활동은 교육활동과 더불어 선교활동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치유활동과 마귀 들린 이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는 구마활동을 실천하신 데 따라서 교회도 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와 복지시설을 세워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국가가 의료와 교육을 맡아서 하게 되었고 복지의 주도권도 국가로 넘어갔습니다. 규모도 커지고 전문성도 요구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점차 국가에게 사회복지의 영역을 넘기고 있는 추세입니다. 사회적 취약계층에 속하는 아동, 장애인, 노인, 여성, 부랑인 등을 위한 보호, 육성, 지도, 치료 및 재활 등의 전통적인 사회복지 서비스정책 등에 더하여 사회보장, 보건의료, 주택 고용, 교육 등이 포함되는 새로운 서비스 정책 등에 있어서 소요되는 비용도 커지고 요구되는 전문성도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실현하는 복지는 하느님 자비의 필요조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실천해야 할 복지는 정부가 나서서 행하는 복지와 경쟁할 것이 아니라 그 틈새를 메꾸어 주는 일입니다.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더욱 그렇습니다. 복지적 행동 전반에 하느님의 자비를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러자면 물질적인 혜택을 형식적으로만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복음적인 투신이 증거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명심해서 조심해야 할 것은, 복지 활동을 선교수단으로 드러내 놓고 이용하려 해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도우실 때 하느님을 섬기듯이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음을 감탄하셨지 그들에게 믿음을 조건으로 선행과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도 자존심과 인격이 있음을 존중하셨지, 무시하거나 천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수호천사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을 일깨워주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에도 나와 있었던 것처럼,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가 주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자비로운 육체적 활동뿐만 아니라,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자비로운 영적 활동에 가톨릭 신자들이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무상으로 돌봄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무상성은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가르침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즉,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게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 지난 2015년 2월 8일, 로마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 성당에서 가까운 아르코발레노 난민캠프를 깜짝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 VATICAN NEWS)


올해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에 교황 레오 14세는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시편 71[70],5)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두는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을 우리 신자들이 배우자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처럼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우리 신자들에게 강하고 굳건한 희망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궁핍하며 불안하고 소외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희망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째가는 유일한 희망이심을 깨달을 때, 우리도 덧없는 희망에서 영원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으면, 물질적 부는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참 보화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언제나 힘차고 명료하게 울려 퍼집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실제로,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가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관심의 부족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상당수의 가난한 이들은 신앙에 특별히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과 강복과 말씀, 성사 거행, 그리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끊임없이 제공하여야 합니다”(200항).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인식이 여기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것이 믿음의 법칙이자 희망의 비결입니다. 곧, 모든 지상 재화와 물질적 실재, 세속적 쾌락과 경제적 번영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부는 종종 우리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가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하느님 없이 살아가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가난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에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말과 지혜로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를 접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거행하는 의미는, 우리 공동체들에게 우리의 모든 사목 활동의 중심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애덕 활동만이 아니라 교회가 기념하고 선포하는 메시지에도 반영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음성과 이야기와 얼굴을 통하여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고자 몸소 그들의 가난을 입으셨습니다. 모든 형태의 가난은 예외 없이, 복음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효과적인 희망의 표징들을 보여 주라는 부름입니다.


근심하는 이의 위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고 그분과 함께 ‘사은 찬미가’(Te Deum)를 부르며 희망의 노래를 높이 올려드립시다. “주님, 저희가 주님께 바랐사오니 영원토록 부끄러움 없으리이다”(In Te, Domine, speravi, non confundar in aeternum).


교우 여러분!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두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배우는 데 인내심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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