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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사람, 왕을 파는 사람 (지성용) '기억'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 지성용 2026-04-10 16: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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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



1,600만 명의 시민이 영화관을 찾았다. 569년 전 죽은 단종(1457)을 2026년의 국민들은 왜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까. 프로이트와 융의 통찰을 빌리자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우리 사회의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정의에 대한 갈망’과 ‘지워진 존재에 대한 부채감’이 단종과 엄흥도라는 상징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기록이 아니라 민심의 준엄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화려한 권력 찬탈사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영월의 하급 관리였던 엄흥도에 주목했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모두가 눈을 감을 때, 그는 유배된 왕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에게 왕은 이용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버려진 그 참혹한 순간에도 곁을 지키며 고통을 함께 ‘살아냈다’. 관객들이 공명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권력의 서사가 아닌, 끝까지 곁에 남은 ‘인간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기억의 전례, 2천 년 전 중동의 청년 예수를 부르다


이러한 기억의 소환은 인류 역사 속에서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왔다. 2천 년 전, 중동의 한 청년 예수는 권력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인류는 그를 죽음 속에 방치하지 않았다. 매주, 매해 반복되는 전례(Liturgy)를 통해 그를 기억의 광장으로 불러냈다. 예수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전례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오늘 우리 곁으로 살려내어, 그가 추구했던 사랑과 정의를 현재의 삶으로 살아내겠다는 강력한 부활의 선언이다.


이 기억의 전례는 오늘날 작가 한강의 문장들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묻는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한강이 그려낸 광주와 제주의 영혼들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들의 고통을 나의 통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을 통해 비로소 완전해지며, 산 자는 그 기억을 짊어짐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살아있는 오늘’이 된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오염된 기억


그러나 정치의 장면으로 오면 이 숭고한 기억은 일순간 왜곡되고 오염된다. 선거 국면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소환할 때, 시민들은 그것을 온전한 애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울시장을 하겠다는 정원오가 박원순 시장을 소환한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살리기 위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을 위한 ‘정치적 호출’로 읽히기 때문이다. 애절한 비극이 권력 쟁취의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민심은 등을 돌린다. 기억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 시대의 중심에서 ‘3철’이라 ‘독수리 5형제’라 불리던 인물들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지난날의 혼란과 무능에 대한 책임은 증발했고, 정치는 다시 비정한 계산기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숨어들고, 누군가는 밀려나며, 누군가는 다시 배지를 향해 달린다. 비루하다. 참으로 비루하다. 그들은 한때 왕과 함께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왕을 파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보다는 자신의 정책과 성과를 들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아스팔트의 연대, 거래되는 정치를 거부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윤석열-김건희 정권의 비정상적인 통치와 계엄의 공포 속에서, 아스팔트 위로 나오라 외치던 그 간절한 소환을. 시민들이 추운 겨울.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민주당은 연대를 말했고 함께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사람을 나누고 줄을 세운다. 소위 ‘배지’를 달았다는 자들은 회의 석상에서 “거리에서 싸운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해도 된다”고 냉소한다. 연합정치의 틀을 부수어버린다. 대통령이 사랑의 교회까지 찾아가 이영훈 목사를 만나며 손을 잡고 평강과 연합을 외치고 있는데, 추운 겨울 아스팔트 거리 위에서 싸워왔던 동료들을 “세력도 없는 시민사회 단체, 대화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연합정치를 걷어차는 발언을 하고 있는 소위 “뺏지”들을 바라보며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말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공천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단종을 기억하는 사회와 죽음을 소비하는 정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하나는 과거의 억울함을 통해 현재를 바꾸려 하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비극을 팔아 현재의 권력을 사려 한다. 지금의 정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지켜내려 했던 그 정치인가.


정치가 답할 차례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왜 지금 ‘왕’이라는 봉건적 언어를 다시 꺼내느냐고. 여기서 말하는 ‘왕’은 권력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고,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라 그 곁에 서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시선은 언제나 지워진 자들의 곁에 머문다. 고통의 곁을 지키지 않고 그 고통을 팔아 연명하는 정치는 영적으로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다. 1,600만 시민은 이미 답했다. 우리는 ‘왕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왕과 함께 살아내는 엄흥도’를 원한다고.


이제 비루한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치가 답할 차례다. 당신들은 기억을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거래할 것인가. 죽은 자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오늘 당신들의 발등을 찍고 있음을 잊지 말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한국영성심리분석상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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