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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설계하는 미국, 평화를 설계하는 한국 (이원영) 불신의 시대에서 신뢰의 시대로 이원영 2026-05-14 17: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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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장면, 하나의 질문


2026년 2월, 밤하늘 어딘가에서 찰나의 충돌이 일어났다.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의 탄두를, 또 다른 비행체가 공중의 한 지점에서 정확히 들이받았다. 박치기다. 외계인의 기술이 아닌가 싶을 만큼 전율스러운 순간이었다.


천궁-II의 실전 배치가 세계에 알린 것은 단순한 기술의 승리가 아니었다. 한국이 더 이상 기술 수입국이나 동맹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 방공망의 패러다임 자체를 재구성하는 주체로 떠올랐다는 신호였다.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에서는 다른 종류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망자 수가 또 늘었고, 그 폭탄의 값은 미국 납세자의 세금이었다. 이라크전쟁 당시 부통령의 전 직장이 재건 사업을 독점 수주하던 구조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군산복합체에게 평화는 불황이고 전쟁은 배당이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왜 미국은 전쟁을 향하고, 왜 한국은 평화를 설계할 수밖에 없는가.


미국이 전쟁을 향하는 이유, 뜻이 아니라 구조


먼저 오해를 피하고 싶다. 이 글은 미국인들이 전쟁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링컨은 금융 기득권에 맞서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려 했다. 케네디는 베트남 철수를 검토했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암살당했고, 케네디가 사라지자 존슨 행정부는 즉각 전면 확전으로 돌아섰다. 개인의 뜻이 바뀌어도 시스템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이 전쟁을 향하는 것은 특정 인물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어떤 개인도 거스르기 어려운 구조적 관성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구조는 크게 세 겹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군산복합체다. 아이젠하워가 퇴임사에서 경고했던 이 괴물은 이제 금융 자본과 결합하여 '영구 전쟁 시스템'을 구축했다. 무기를 사고 군대를 유지하는 데 국가의 혈세가 우선 투입되는 동안, 시민들의 삶을 지탱해야 할 복지와 공공 서비스는 뒷전으로 밀린다. 전쟁은 이들에게 산업이다. 최근 트럼프의 브레인이나 다름 없는 피터틸이나 알렉스카프가 추구하는 것은 이같은 기술패권주의다.


두 번째는 달러 패권이다.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국가 경제를 질식시키는 이 구조는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페트로달러 체계는 미국의 군사적 존재감이 세계 에너지 거래를 매개하는 한 유지된다. 평화는 이 체계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세 번째는 동의의 조작이다. 노엄 촘스키가 갈파했듯, 자본에 포획된 언론은 전쟁의 비참함을 '정밀 타격'이라는 깔끔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타국의 주권 침해를 '자유의 확산'으로 둔갑시킨다. 시민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본이 허용한 스펙트럼 안에서만 논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폭로가 이루어져도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펜타곤 페이퍼도, 스노든의 폭로도 대중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소모시키는 배출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 세 겹의 구조 앞에서 미국의 평화 수사학은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뜻은 평화를 향해도, 구조는 전쟁을 향한다.


한국이 평화를 설계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조건


그렇다면 한국은 왜 평화를 설계하는가. 이것도 미덕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조건의 문제다. 한국이 처한 세 가지 구조적 조건이 평화를 생존의 전제로 만든다.


첫 번째 조건은 지리다. 한반도는 전장이 되는 순간 가장 먼저 소멸하는 곳이다. 미중 경쟁의 대리전장, 북핵 위기의 최전선, 미국의 중국 견제 거점. 이 모든 구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그 비용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치르는 것은 한국 시민이다. 세금, 안전, 생명, 노동 모두 시민의 몫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시민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진다. 전쟁이 동맹의 목적이라면, 시민은 동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에너지다. 한국은 핵지뢰 위에 앉아 있다. 고리, 한울, 한빛, 월성 — 네 단지에 26기의 원전이 밀집된 이 나라에서 전쟁은 직접 원자로를 때리지 않아도 된다. 2026년 2월, 경주 문무대왕면 산불의 발화 지점은 월성 원전에서 직선거리 7~10킬로미터였다. 풍향이 조금만 달랐다면, 송전선로가 끊겼다면. 외부 전원이 상실되고 비상 디젤 발전기마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노심 용융으로 가는 시간폭탄이 시작된다. 이것이 후쿠시마의 교훈이고, 자포리자의 현실이다. 재래식 전쟁이든 드론 한 대든 사이버 공격이든, 송전탑 몇 기만 무너지면 한반도를 넘어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 방사능 피해가 미친다. 조금의 충돌도 치명적이라는 것 — 이것이 한국을 평화의 설계자로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이다.


세 번째 조건은 기술이다. 천궁-II가 구현한 직격 요격 체계는 그 설계 원리상 선제 공격에 전용될 수 없다. 상대의 발사를 감지하고 궤적을 계산해 요격하는 이 체계는, 공격자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작동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 KSS-III 잠수함이 선택한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의 초정숙 기술도, 핵추진이라는 상징보다 연안 생존성이라는 실질을 택한 것이다. 한국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방산 역량은 대체로 침략이 아니라 억제와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방어적 불가역성'이 한국 기술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지리, 에너지, 기술. 이 세 조건이 한국에게 평화를 의지가 아닌 필연으로 만든다.


불신의 구조, 한국 내부의 과제


그러나 솔직하자면 한국 내부에도 불신의 구조가 있다. 원전이 대표적이다.


5년 단임 대의제는 100년짜리 에너지 결정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어왔다. 탈원전에서 친원전으로, 다시 그 반대로. 이것은 특정 정권의 과오가 아니라 19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독재 방지였고, 그 결과 권력의 분산을 얻었지만 장기적 국가 전략 수립 능력을 잃었다. 더구나 현대의 대의제는 갈수록 자본권력의 대리인으로 기능한다. 윤석열과 트럼프가 단적인 예다. 의사결정 능력의 저하가 민주주의의 진짜 위기다.


방산 수출이 커질수록 한국도 분쟁이 있어야 무기가 팔리는 구조적 유인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설계하는 한국'은 선언에 그친다.


그렇기에 이 기획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이나 외교만이 아니다. 시민이 직접 결정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국가 운명이 걸린 원전 문제를 기명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필자의 제안은 그 맥락에서 나온다. 익명의 그늘에 숨어 현재의 편익만 좇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미래 세대 앞에 선 주권자로서 이름을 걸고 선택하는 것. 민주주의를 다시 발명해야 한다는 것, 민치제(民治制)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 — 이것이 불신의 구조를 내부에서 깨는 방법이다.


평화를 설계하는 네 가지 방법


한국이 평화를 설계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설계하는가. 이미 윤곽이 보이는 네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방패를 나누는 나라가 된다. 천궁-II로 대표되는 한국의 방어 기술은 한 나라의 독점 자산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공유하는 '안보 공공재'로 설계될 수 있다. 스웨덴이 그리펜 전투기를 중소국에 합리적 조건으로 공급하며 지역 균형의 수단으로 삼아온 것, 이스라엘이 아이언돔 파생 기술을 동맹 강화의 자산으로 운용한 것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이 공급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억제와 보호에 특화된 체계다. 수출 대상국의 정치 체제가 아니라 무기 자체의 물리적 성격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찾는 이 원칙이, 한국 모델의 고유한 브랜드가 될 수 있다.


방어자가 공격을 하지 않으면서도 지키는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면, 공격자는 스스로 상처를 입고 공세를 포기하게 된다. 이 패턴이야말로 전쟁을 멈추게 하는 진정한 평화의 메커니즘이다.


둘째, 핵지뢰를 제거하고 에너지를 혈류로 만든다. 원전은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번의 충격으로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취약성 기반의 구조다. SMR조차 위험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공격 표적을 전국에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핵지뢰를 10개에서 100개로 늘리는 셈이다.


반면 분산형 재생에너지 그리드는 일부가 파괴되어도 전체가 유지되는 회복력 기반의 시스템이다. 배터리, 소재, HVDC — 한국이 이미 경쟁력을 갖춘 이 기술들이 장기적으로 동북아 슈퍼그리드와 연결되면, 한반도 평화는 무기 판매보다 대륙 전체가 하나의 전력과 데이터 플랫폼으로 연결될 때 창출되는 시스템 수익으로 구조화된다. 방산이라는 근육으로 억지력을 유지하되, 국가의 신경망인 에너지는 분산형 그린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것 — 이것이 핵지뢰 국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셋째, 시민이 동맹의 방향을 통제한다. 2025년 9월, 조지아주 서배나의 현대차·LG 배터리 공장에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이 들이닥쳐 수백 명이 구금됐다. 그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 동맹국 시민이 동맹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전쟁경제 이민정책 노동구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같은 시각 가자지구에서는 민간인 사망자가 계속 늘고 있었고, 한국은 동맹이라는 이유로 침묵했다.


동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비용을 치르는 시민이 동맹의 핵심 결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구조, 이것이 불신의 시대를 만드는 원인이다. 재미한인 230만 명은 미국 정치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의 시민과 워싱턴의 시민이 같은 언어로 연결되는 순간 — "한반도가 전쟁의 전장이 될 결정에 우리의 동의가 필요하다", "우리의 세금으로 굴러가는 전쟁에 우리의 동의도 없었다" — 한미동맹은 전쟁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전쟁을 막는 시민의 동맹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할 것이다.


넷째, 분단의 접경을 인류 협력의 거점으로 만든다. 1945년에 설계된 국제 질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다. 유엔 안보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앞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앞에서, 거부권이라는 장치에 무력하게 침묵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체포 영장을 발부해도 집행할 방법이 없다.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이다.


동시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했다. 중국, 일본, 한국 3국만 합쳐도 세계 경제의 22~23%이다. 그러나 동북아 3대 도시의 국제기구 본부는 브뤼셀 하나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미국은 66개 국제기구 및 유엔 산하기구에서 탈퇴와 재정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공백이 생겼다.


이 세 조건이 동시에 맞물리는 지금, 필자는 한강하구를 주목한다. 인천공항까지 1시간, 베이징·상하이·도쿄까지 2시간. 서해와 유라시아 대륙철도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상 유일한 지점. 70년간 접경지대로 묶여 손 못 댄 북한 땅 — 개풍군을 중심으로 DMZ부근의 땅ㅡ 여기에 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군축을 다루는 국제기구들이 들어선다면, 기구의 존재 자체가 평화의 물리적 보증이 된다. 한강하구를 침범하는 것은 그 기구들에 입주한 수십 개국을 동시에 건드리는 일이 된다. 브뤼셀이 유럽에서 한 역할을 한강하구가 동북아에서 할 수 있다. 방어하는 평화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평화다.



▲ 필자가 일찍이 제안한 국제기구도시의 구상. 이런 도시가 들어서면 한반도는 영구적인 평활를 얻을 수 있다. ⓒ 이원영



신뢰를 구조화한다는 것


신뢰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제도가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지속된다. 이것이 이 기획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다.


공공재적 안보는 방어 기술을 공유함으로써 이해관계를 연결한다. 에너지 그린 네트워크는 대륙을 하나의 혈류로 묶어 분쟁의 비용을 높인다. 시민동맹은 전쟁의 결정권을 시민에게 돌림으로써 전쟁의 문턱을 높인다. 한강하구 국제기구도시는 분단의 접경에 수십 개국의 이해관계를 물리적으로 심는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신뢰를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만들려는 시도다. 상대를 믿기 때문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의 구조가 만들어지면 신뢰가 따라온다는 것. 이것이 불신의 시대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물론 이 길에 세 가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방어 무기의 확산이 새로운 군비경쟁의 나선을 낳을 수 있다는 역설, 공급의 원칙이 정치화되면 새로운 패권이 된다는 위험, 그리고 국내 정치의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 전략적 일관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조건. 이 함정들을 의식하며 설계하는 것 — 그것이 이 구상이 선언이 아닌 전략이 되는 조건이다.


상상이 전략이 되는 순간


노예제 폐지도, 여성 참정권도, 유럽연합도 처음에는 공상이었다. 역사는 불가능이 필연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천궁-II가 초음속 탄두를 박치기로 격파하는 순간, 그것은 방공 기술의 승리만이 아니었다. '방패를 나누는 나라'로서의 대한민국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경주 산불이 월성 원전 7킬로미터 앞까지 밀려오던 순간, 그것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핵지뢰 위에 앉아 있는 나라가 평화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경고였다. 재미한인 수백 명이 동맹국 공장에서 구금되던 순간, 그것은 단순한 이민 단속이 아니었다. 시민이 배제된 동맹이 결국 시민을 희생시킨다는 구조의 폭로였다.


이 신호들이 연결될 때 하나의 전략이 된다. 군사 억지력이라는 근육, 에너지 전환이라는 신경망, 시민 통제라는 면역계, 국제기구 도시라는 심장 — 이 네 가지가 함께 작동하는 몸이 비로소 평화를 설계할 수 있는 국가다.


미국의 구조는 전쟁을 향한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뜻이 아니다. 구조의 관성이다. 한국의 조건은 평화를 향한다. 그것이 한국인들의 미덕만은 아니다. 조건의 필연이다. 그러나 필연이 전략이 되려면, 의식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불신의 시대가 만들어낸 세계 —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는 수동적 평화, 시민이 배제된 동맹의 결정, 5년 정권이 뒤집는 100년의 선택 — 이것을 넘어서는 신뢰의 시대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설계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무게를 짐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꾸는 것. 방패를 나누고, 핵지뢰를 걷어내고, 시민이 동맹을 통제하고, 분단의 땅에 인류의 거점을 세우는 것. 이것이 한국이 불신의 시대에서 신뢰의 시대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천궁-II가 찰나의 순간에 탄두를 격파하듯, 역사도 어느 찰나에 방향을 바꾼다. 지금이 바로 그 설계를 시작할 때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겨레:온>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이원영 :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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