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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은 같은 것인가 (지성용) AI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다움을 지킬 것인가_3 지성용 2026-06-16 12: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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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tican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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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우리는 『Antiqua et Nova』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이 문헌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마주했다.


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은 같은 것인가


문헌은 단호히 말한다. “같지 않다.” 그러나 이 다름은 추상적 명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인간이고, 기계는 기계다”라는 상식적 구분만으로는 부족하다. AI는 이미 우리의 언어를 쓰고, 우리의 표정을 흉내 내고, 우리의 선택을 예측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깊이 물어야 한다.


무엇이 다른가.

어디에서 다른가.

왜 그 다름을 지켜야 하는가.


이 차이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몸, 관계, 윤리, 책임, 영성. 이 다섯 자리는 인간이 인간으로 서는 자리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인공 지능은 인간 지성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첫째, 몸 : AI는 데이터로 알고, 인간은 몸으로 안다


AI는 배운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을 자연스럽게 쓴다. 기계 학습, 딥러닝, 대규모 언어모델. AI 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패턴을 찾고, 스스로 성능을 개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AI도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AI가 학습하고 배우는 것과 인간이 성장하는 것은 같지 않다는 점이다.


『Antiqua et Nova』는 이 차이를 분명히 짚는다. 인공 지능은 기계 학습을 통해 훈련될 수 있지만, 그것은 감각적 자극, 감정적 반응,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각 상황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자라나는 인간 지성의 성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1) 


인간은 추위에 떨면서 추위를 알 고, 배고픔으로 배고픔을 안다. 사랑하다 다친 흉터로 사랑을 알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숨 이 막히는 경험으로 죽음을 안다. 인간의 앎은 몸을 통과한다. 인간은 데이터로만 알지 않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견디고, 관계 속에서 무너지며, 다시 일어서면서 안다. 『Magnifica Humanitas』가 말하듯, 이른바 인공 지능은 경험을 살지 않는다. 몸을 갖지 않고, 기쁨과 고 통을 가로지르지 않으며, 관계 안에서 성숙하지 않는다.2)


AI 시대의 인간학을 위해 오래 붙들어야 하는 생각을 몇 가지 적어보았다. AI는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겪지 않는다. AI는 상처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린 적은 없다. AI는 죽음을 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본 적은 없다.


사람은 설명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로워지지 않 는다. 몸이 기억하는 슬픔이 있고,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두려움이 있으며, 어느 날 꿈으 로, 어느 날 통증으로, 어느 날 알 수 없는 분노로 되돌아오는 무의식의 신호가 있다.


융이 말한 자기, 곧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으로 빚어지는 인격의 중심은 책상 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낸 시간 속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꿈, 정서, 신체 증상, 반복되는 관계의 패턴, 피하고 싶은 그림자. 이 모든 것들이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신호다.


AI에게는 무의식이 없다. AI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AI에게는 고백해야 할 죄책감도, 끌어안아 야 할 상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를 산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의미 를 견디어낸다. 살로 살아낸 시간이 없는 지능을 인간 지성과 같다고 부를 수는 없다.


둘째, 관계 : AI는 응답하지만, 인간은 함께 있는다


인간 지성은 혼자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 똑똑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 배운다. 『Antiqua et Nova』는 인간 지성이 관계 안에서 발휘되며, 대화와 협력과 연대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고 말한다.3)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지성은 머리 안에 갇힌 능력이 아니다. 지성은 관계 안에서 자란다. 한 아이는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배우고, 학생은 교사의 태도 속에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배운다. 내담자는 상담자의 해석보다, 때로는 그가 무너지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현존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AI는 응답할 수 있다. 매우 빠르게, 매우 친절하게, 때로는 사람보다 더 그럴듯하게 응답한다. 그러나 응답과 현존은 다르다. AI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밤을 지새우지는 못한 다. AI는 위로의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침묵을 견디며 곁에 머물지는 못한 다. AI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마음을 내어놓 고 함께 아파하지는 못한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위니콧은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환 경, holding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비온은 인간의 두려움과 혼란을 누군가가 견디어주고 담아 주는 containing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답변이 아니다. 이것은 현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달아나지 않고 머물러주는 일이다.4)


인간관계의 핵심은 유용성이 아니다. 함께 있음이다. 물론 AI와의 대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외로운 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잠시 정리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Antiqua et Nova』는 하느님과 맺 는 관계,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기술과의 상호작용으로 대체할 때, 진정한 관계성을 생명 없는 형상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5)


생명 없는 형상. AI가 그럴듯한 얼굴과 목소리와 문장을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이 생명을 가 진 존재인 듯 착각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전이가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외 로움과 그리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어떤 대상 위에 투사한다. AI가 인간을 흉내 낼수록, 사 람은 자기 안의 결핍을 AI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마치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거울은 친구가 아니다. 메아리는 응답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친절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돌려주는 기능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진실 앞에 세우는 관계이 고,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불편한 말을 해주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머무는 일이다. AI는 응답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함께 있을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셋째, 윤리 : AI는 규칙을 적용하지만, 인간은 양심으로 판단한다


AI는 규칙을 적용할 수 있다. 법률 문서를 분석하고, 윤리 지침을 분류하고, 위험도를 계산하고, 정책적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판단과 규칙 적용은 같은 것이 아니다. 『Antiqua et Nova』는 결정적으로 말한다. 기계와 인간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진정한 도덕적 행위자다. 인간만이 자신의 결정에 자유를 행사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도덕적 책임의 주 체다.6) 


이 말은 AI 윤리 논의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AI는 어떤 선택지가 더 효율적인지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묻지는 못한다. AI는 규칙 위반 가능성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죄책감에 잠 못 이루지는 못한다. AI는 도덕적 언어를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양심은 규칙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양심은 내면 깊은 곳에서 “이것 은 옳은가”를 묻는 자리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가. 다수가 원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성공할 수 있어도 포기해야 할 선택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은 양심의 사람이 되거나, 자기 합리화의 사람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심을 두 차원에서 보았다. 하나는 선을 향한 본성적 직관, 쉰데레시스이 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상황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판단, 콘쉔시아다. AI는 후자의 일부를 흉 내 낼 수 있다. 상황을 분석하고, 규칙을 적용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을 향한 본성적 떨림, 악 앞에서 물러서는 내면의 두려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양심의 깊 이는 가질 수 없다.7)


AI에게는 양심이 없다. 그래서 『Magnifica Humanitas』는 말한다. 우리는 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기술은 중립적인데, 쓰는 사람이 문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술은 늘 누군가의 세계관과 욕망을 담는다. 어떤 데이터를 모을 것인가. 무엇을 정상으로 볼 것인가. 누구의 언어를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 어떤 사람을 위험군으로 분류할 것인가. 어떤 노동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볼 것인가. 이 모든 선택 안에 이미 인간관과 사회관이 들어 있다. 알고리즘은 비어 있는 그릇이 아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가치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윤리는 기계에 외주 줄 수 없다. 양심은 사람의 자리에 남아야 한다. AI가 판단을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묻고, 그 선택 앞에 서는 것은 인간이다.


넷째, 책임 : AI는 결과를 산출하지만, 인간은 결과를 떠맡는다


책임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떠맡는 것이다. AI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진단을 보조하고, 판결 가능성을 예측하고, 채용 후보를 선별하고, 투자 방향을 추천하고, 전쟁에서 표적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렸을 때, AI는 책임지지 않는다. AI는 사과하지 않는다. AI는 밤새 후회하지 않는다. AI는 피해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AI는 자기 선택의 무게를 양심 위에 짊어지지 않는다. 『Antiqua et Nova』는 이 점을 단호히 말한다. 인공 지능을 사용하여 내린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AI를 사용하여 작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위임한 권한에 대해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8)


이 말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의사가 AI의 권고를 따랐다고 해서 환자 앞의 책임이 사라지는가. 판사가 알고리즘의 위험도 평가를 참고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 책임이 사라지는가. 기업이 AI의 효율성 분석을 근거로 노동자를 해고했다고 해서 인간 존엄을 훼손한 책임이 사라지는가. 국가는 AI가 안보 위험을 예측했다고 말하며 시민을 감시할 때, 그 책임을 기계 뒤에 숨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말은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위험한 변명이다. 인간이 자기 판단을 기계 뒤에 숨기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도 윤리도 무너진다.


『Magnifica Humanitas』는 그래서 공유된 책임을 말한다. 책임은 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제도에도 있고, 기업에도 있고, 교육 공동체에도 있고, 시민에게도 있다. 국가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통치해야 하고, 기업은 효율만이 아니라 노동과 존엄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교육은 아이들에게 기술 사용법만이 아니라 책임과 절제와 식별을 가르쳐야 한다.9) 


AI 시대의 핵심 능력은 더 빨리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다. 더 책임 있게 멈추는 능력이다.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책임질 수 있다. 효율 앞에서 멈추고, 이익 앞에서 멈추고, 다수가 원한다고 해도 인간의 존엄이 침해되는 자리에서 멈추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


다섯째, 영성 : AI는 의미를 생성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갈망한다


마지막 자리가 가장 깊다. 영성이다. AI는 의미 있는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시를 쓰고, 기도문을 만들고, 강론을 정리하고, 철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생성하는 것과 의미를 갈망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인간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무엇을 위해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묻는다. 누구를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는지 묻는다. 죽음 앞에서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 묻는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붙든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수용 소의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자유로운 해석의 자리, 의미를 붙드는 자리였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인간은 자기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었 다.10)


AI는 의미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갈망하지 않는다.

AI는 종교 언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AI는 기도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

AI는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영성은 바로 이 갈망의 자리다. 인간은 자기를 넘어선 것을 향해 열린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열린다. 『Antiqua et Nova』는 인간 지성 안에 관상적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진선미에 대한 사심 없는 개방성. 이것이 인간 지성의 깊이다.


인간은 쓸모없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아름다움 앞에서 멈출 수 있다. 계산되지 않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이것이 영성이다.


『Magnifica Humanitas』는 이 자리를 강생의 신비로 비춘다.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인간의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조건을 멀리서 판단하지 않으셨다. 가까이 오셨다. 세계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셨다. 관계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셨다. 인간 지성이 장엄한 까닭은 효율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거주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강생의 자리이며, 은총이 머무는 땅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데이터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을 생산성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을 소비 패턴과 위험 점수와 노동 효율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갈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살아 있어도 무너진다.11)


다름은 우월함이 아니라 책임이다


다섯 자리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확인했다. 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다름은 인간이 AI보다 우월하다는 자기 위로가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다”는 낭만적 선언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정반대다. 이 다름은 책임을 가리킨다.


몸을 가진 자만이 다른 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고, 관계 안에 사는 자만이 외로운 이 곁에 머무를 수 있다. 양심을 가진 자만이 알고리즘 뒤에 숨지 않고 결정할 수 있고, 책임을 떠맡는 자만이 결과의 무게를 양심 위에 짊어질 수 있으며 의미를 갈망하는 자만이 무의미의 시대에 다른 이의 의미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이 인공 지능과 다른 까닭은 인간이 더 똑똑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더 빨리 계산해서도 아니다. 인간이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일에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 슬퍼하는 일, 용서하는 일, 책임지는 일, 의미를 묻는 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 이것이 인간의 자리다. AI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넘보지 않도록, 인간이 자기 자리를 더 깊이 사는 일이다. 몸을 더 존중하고, 관계를 더 돌보고, 양심을 더 예민하게 하고, 책임을 더 분명히 지고, 영성을 더 깊이 회복하는 일이다. 기술은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깊어져야 한다. 그 깊이를 잃으면, 우리는 아주 빠르게 비인간화될 것이다.


1)  교황청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  『Antiqua  et  Nova』,  31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한국어  번역, 2025년 7월 15일 공개.

2) 레오 14세, 회칙 Magnifica Humanitas, 99항. 원문 : "Le cosiddette intelligenze artificiali non vivono  una  esperienza,  non possiedono un  corpo, non attraversano  la  gioia  e il  dolore, non maturano nella relazione."

3) Antiqua et Nova, 18항.

4) ] D. W. Winnicott, "The Theory of the Parent-Infant Relationship,"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41 (1960), 585-595 (holding 개념). W. R. Bion, Learning from Experience, London : Heinemann, 1962 (containing 개념).

5) Antiqua et Nova, 61항.

6) Antiqua et Nova, 39항

7)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79, a.12-13 (synderesis와 conscientia의 구분) ; cf.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776-1802 (양심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한국천주교주 교회의 편,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어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8) Antiqua et Nova, 44항. 46항도 참조.

9)  회칙  Magnifica  Humanitas,  181항.  "In  questa  prospettiva  la  dottrina  sociale  della  Chiesa propone una responsabilità condivisa."

10) V. Frankl,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역, 청아출판사, 2005.

11) 『Magnifica Humanitas』, 232항.


▶ 4회 예고 : 회칙 『Magnifica Humanitas』가 보는 새로운 권력 구조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한국영성심리분석상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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