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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들이 물 길을 내야 한다.
  • 편집국
  • 등록 2015-04-15 20:18:08
  • 수정 2015-06-08 16: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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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직의 모습은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진솔한 희생의 삶, 시대의 징표를 인식하고 증언하는 역할, 평신도와 함께 수평적 네트워크 안에서 협력하며 논의하는 자세, 돈과 권력과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힘 있는 자에게는 더욱 당당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겸손한 태도, 기도와 묵상에 게으르지 않은 영성적인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윗물과 아랫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주교와 사제, 사제와 신자는 흐르는 물과도 같은 관계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것이다. 홍수설화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것은 문명과 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창세기6장에서 접한다.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설화, 인디언들의 대홍수 이야기 등 다양한 홍수이야기가 있는데, 이들 사이에 일련의 공통된 흐름이 여기에 있다.


중국 홍수 설화를 하나 들여다보면 좀 더 명확해 진다. 중국의 치수에 대한 다툼은 물을 막는 ‘둑 쌓기’와 물을 터주는 ‘물길트기’ 사이의 싸움이었다. 중국 최고의 토목기술자로 지칭되는 곤(鯤)은 큰 물고기를 뜻하는데 그 이름처럼 그는 물 관리 전문가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곤(鯤)은 9년 동안 물길을 잡으려 했지만 둑을 쌓아 물을 막으려 했기에 실패했다.


반면 치수에 성공한 우(禹)는 강의 굽이마다 수로를 파서 홍수가 빠져나갈 통로를 만드는데 성과를 내서 결국 임금의 자리에 까지 올라간다. ‘곤(鯤)’이 실패한 이유는 둑을 만들어 물길을 막았기 때문이고, ‘우’가 성공한 이유는 물길을 터 주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의 정치가 정자산은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더 지나친 일이다.” 라며 곤과 우의 이야기를 빗대어 말한다.


‘물 다스리기’처럼 ‘사람 다스리기’도 흐름을 존중하는 소통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말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온다. 이러한 말을 틀어막으면 물길이 터져 난리가 나는 것처럼 큰 재앙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천주교회는 물길과 말길이 꽉 막혀 있는 느낌이다. 흐르는 물이 되지 못하고 웅덩이에 고여 썩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가톨릭의 교계제도는 교황을 정점으로 지역의 주교들과 사제들, 부제들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 뿐만은 아니겠지만, 주교의 선임문제에 있어 이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인지 교회의 사제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더더욱 이 과정에 대해서 모른다. 교회공동체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인데, 이 백성의 지도자를 뽑는 과정을 백성들이 지켜 볼 수 없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결정’ 이라는 방식의 주교 임명에 많은 이들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게 선출된 주교가 바른 성덕과 지적인 명민함, 시대의 징표에 대한 올바른 식별을 가지고 봉사자로서의 자기 임무에 충실하다면야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라님 만큼이나 높고 멀어만 보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과 판단으로 교구의 재산과 운영에 낭패를 보게 된다면 이것은 과연 누가 개입하여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국 애틀랜타의 윌튼 그레고리 주교는 2014년 3월 31일 자신이 최근 호화 저택을 지은 사실에 대해 사과하고 저택을 처분한 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그레고리 주교는 지역 가톨릭 언론 ‘조지아 불리틴’에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지역 교회의 목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레고리 주교는 애틀랜타의 고급 주택가 벅헤드 지역에 220만 달러, 우리 돈 23억 원 가량을 들여 저택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지역 언론과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가 지은 집은 557㎡(168평)의 대지에 영국 튜더 왕가 시대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5명이 묵을 수 있는 규모다. 건축비용은 성당 예산 190만 달러와 기부금 30만 달러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레고리 주교의 사과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호화 주교관 건축에 4300만 달러(약 454억원)를 사용해 물의를 빚어 정직 중이던 독일 림부르크교구의 프란츠-페터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의 사임을 공식적으로 접수한 직후 이뤄졌다.


AFP통신 등에 의하면, 문제의 독일 림부르크 교구장이 가난한 인도의 슬램가를 방문하면서 특등석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가 망신을 당한 일을 보도하면서, 신자들이 납부, 교회에 분배되는 ‘교회세’의 일부가 유용됐을 가능성도 있어 독일 가톨릭교회가 조사에 착수했다고 전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서는 교구장의 투명하지 못한 교구 예산 운영을 어떻게 감사하고,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 교구의 평신도 협의회에조차 결산보고를 하지 않으면서 본당에서는 재정위원회를 구성하라 지시하면 누가 그 말을 따를 것인가 말이다.


최근 많은 평신도들은 교구의 재산 운영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는 교구의 재산과 정기적인 보고절차가 없는 예산 사용 내역에 의혹과 우려를 내비친다. 이처럼, 투명하지 않은 운영진이 어떻게 지역 본당들을 감사하고 판단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있음을 주교를 비롯한 교회 운영진들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교들은 주교로 임명되면 정년 75세까지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중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먼저 퇴임했거나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아름다운 정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권력의 자리에서 스스로 그를 내려놓기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서는 5년 만 지나도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들이 바뀌고 개선되어 시대에 맞는 지도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대통령도 그 임기를 5년으로 규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뜻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통치의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 사회나 경영일선의 지도자들도 5년만 지나면 리더십의 한계에 도달해 교체하는 형편인데 수십 년간 교구장 직을 유지하는 주교는 자신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 사제단 안에서도 어려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교들의 소통부재와 사제들과의 소통실패는 서로 간에 의심과 회의, 분열과 고립의 악순환, 인사권을 통한 징계와 갈등이라는 문제를 만들어 내고, 인사에 대한 불이익의 장기화를 우려하는 사제들은 아예 우리 본당, 지구에서나 조용히 불만을 토로하면서 교구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이로써 사제들은 점차 위축되고 주교와 사제 간의 말길이 막혀 버리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좁은 땅 안에서 15개의 교구로 분리되어 살아간다. 모두 5시간 이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다. 남한 인구의 85%가 도시에 집중해 있는데, 또 도시로 이주하는 신자들은 10만 명 이상이나 된다. 그러나 사제들은 교구 밖으로 이동하지 않고 소위 ‘나와바리’(구역)를 고집한다. 물은 고이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현행 교구와 본당 중심의 행정구조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의 분열 이후 더 이상의 분열을 막고 제도교회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봉건시대의 지배구조를 확립하게 된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국경이 무의미해지고, 인터넷을 통한 월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국경 없는 사회 안에서, 속지적이고, 공간적 점유지역에 집착하는 운영의 틀은 분명 문제가 있다.


새롭게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는 신도시에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여러 개의 본당이 비싼 땅값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후죽순처럼 신설되는데, 도시 안에서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지역에서는 성당을 찾아가기가 애매하고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본당 별 구역 구분에 있어서도 갈등이 노출되는 경우들이 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바로 보이는 잘 지어진 성당이 있는데, 몇 킬로를 걸어야 하는 상가고층성당으로 올라가는 신자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떨까?


이러한 교구간의 장벽과 본당 간의 장벽으로 또 15개의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교구청을 운영하며 사용하는 중복예산 및 인사문제, 7개의 대신학교를 운영하며 생겨나는 학생과 교수의 자질 문제는 한국 교회 문제 양산의 지점들이다. 곧 교구의 무분별한 분화가 행정과 예산의 중복투입 및 부적절한 자원분배로 나타났고, 거꾸로 교구 내 본당들의 수적 팽창은 공동체의 파괴와 분열로 이어졌다.


본당들이 분당이라는 교구의 명이 떨어지면 기존의 공동체에 균열이 생긴다. 성가대, 복사단, 구역, 반으로 오랫동안 친교를 이루어 오던 형제·자매들이 행정적인 분당으로 서로 타 본당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것이 ‘교회법?’으로 인지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강박에 ‘신심 깊은’ 신자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맺어온 관계를 뒤로 하고 신설본당으로 짐을 꾸려 나간다.


그 밖에도 이 과정에 생겨나는 신자들과 사제들 간의 갈등은 애매한 자리다툼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고, 선·후배 사제들 간에도 오해와 다툼의 소지가 된다. 교회인지 행정기관인지 알 수 없는 교구청의 경직된 운영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한다.


물은 흘러야 한다. 교구간의 장벽도 허물어져 흘러야 하고 본당들 사이에 속지주의도 흘러야 하고, 교구장과 사제들도 물길을 터야하고 사제와 신자들 간에도 물길을 터야한다. 강은 흘러야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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