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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2일 나는 진도 팽목항을 향하고 있었다.
  • 박준호
  • 등록 2015-04-15 20:28:57
  • 수정 2015-04-16 14: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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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금이면 좋겠다’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고,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었다.


첫 만남은 지난 9월 한 모임에서였다. 승현 아버님은 900km의 십자가 도보 행진을 끝내시고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힘든 여정을 끝낸 후 여서인지,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하고 있어서 인지 얼굴이 무척 수척해 보이셨다. 아버님은 오로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신념하에 팔도를 돌면서 힘든 여정을 보내고 계셨다.


아버님을 본 순간 그 분의 눈에는 분노와 울분이 가득 차 있었고, 한편으로는 외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 눈앞에서 진실이 호도되고 거짓이 진실 되어 버린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어떤 부모인들 쉽게 견딜 수 있을까? 자식을 눈앞에서 잃고 말았는데, 그리고 살려 달라는 자식의 외침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렇게 아프게 보내야만 했는데, 제 정신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모임에 승현 아버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난 많이 흥분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니 그 어떤 위로의 말이 있을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을 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말로도 자식을 잃은 분들을 위로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섣부른 위로의 말 대신 승현이의 모습을 아버님께 보여 드리는 게 좋겠다 싶었다.

몇 번의 수정을 반복하고 어설픈 승현이 영상을 만들었다. 그리곤, 승현 아버님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버님을 위해서 만든 승현이 모습이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하고, 승현 아버님은 나를 빙그레 쳐다보곤 웃으시며 보시겠다고 하셨다. 작은 휴대폰으로 승현이 동영상을 보여 드리자, 꼭 갖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며 너무나 기뻐하셨다. 너무 감사 하다고. 그리곤 감사히 받으셨고, 모임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에게 보여 주시기도 했다.


승현 아버님과의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그 모임을 그렇게 끝마치고, 몇 달 후 광화문 천막에서 저녁 미사를 준비하는 아버님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났고 아버님과 아름이가 많은 분들을 만나고 계셔서 나를 기억할까? 싶었었는데 다행이 아름이와 아버님은 나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것이 아버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의 모습은 지난번에 보았던 분노에 차 어찌할 줄 모르던 눈빛이 아니라 조금은 안정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슬픔과 깊은 한이 묻어 있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버님께서 건넨 첫 마디는 “900km 도보를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는데 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려고 합니다. 삼촌도 그때 꼭 와 주세요.” 하는 초대의 말씀이셨다.



사실 나는 아버님 도보 행진 하실 때에는 함께 하지 못했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그렇게 뜻 깊은 자리에 내가 함께 해도 될까? 싶었다. 그렇지만 아버님이 초대해 준 자리이니 참석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님 댁에서 열린 모임에서 아버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음식을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이어져 왔다.


그렇게 힘든 2014년 한해를 보내고 어느 날 “이대로 있을 수 없다” 하시며, 가만히 방안에서 지낼라 하니 견디기 힘드시다며, 지난해의 고행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꺼내셨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는 보다는 어떻게든 덮으려는 정부의 태도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아이들은 잊혀지고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 그만해”, “지겹다”라고 얘기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자식을 잃은 처절한 부모의 심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던져 세상에 경종을 울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 후 아버님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하든 말리고 싶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900km의 고행을 했는데도 바뀐 것은 없는데, 편파적으로 보도 되고 있는 이 현실에서 무엇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 수 있을까? 더구나, 도보도 아닌 500kg의 모형 배를 이끌고 삼보일배로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어떻게 온단 말인가? 더욱이 인정하기 싫은 건 그 피해자들이 왜 다시 거리 위에 나가야만 하는지 한 순간 소중하고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위로 받지 못하고 고행을 자처해야 하는지.


가해자들은 저렇게 당당하게 웃고 있는데 왜?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걸까? 지금은 내가 피해자가 아니지만 다음에는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안전하지 못한 사회가 되어 버렸는데,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만 아니면 돼’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며칠 동안 생각을 거듭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이대로 있는 것 보다는 밖으로 나가야겠다. 승현이를 가슴에 묻은 한을 땅에서라도 풀어야겠다. 나를 던져서 국민들이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해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 이다 하시며, 당신의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


나는 더 이상 아버님을 만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고 결국 시간이 왔다. 아버님께서는 삼보일배를 하시겠다고 결심 하신 후, 한달동안의 긴 시간을 잠도 이루지 못하며 고뇌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시기도 했다. 삼보일배 하다가 도로에서 차에 깔리지 않을까? 누가 와서 고의로 사고를 내지 않을까?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난다고. 그만큼 아버님 스스로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껏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에 그리고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승현이와 별이 된 아이들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길 위에서야 하는 두려움이 왜 없으셨겠는가? 그렇게 시작된 삼보일배의 여정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떠난 지 5시간이 훌쩍 지나고, 우리 일행은 길을 떠나기 전 미리 예약을 해놓았던 숙소에 도착했다.


긴 시간을 달려와서 인지 하늘은 검게 물들었다 보이는 불빛만으로 인가가 있는지 가늠이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고, 얼굴의 살들은 찢어지는 듯 아파왔고,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는 파도 소리만이 들려 왔다. 저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내 귀에 대고 “도와주세요.” 라고 이야기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거친 파도가 온 세상을 휩쓸고 난 후 찾아오는 평화처럼, 사자가 먹잇감을 낚아챈 후, 살려고 발버둥 치던 먹잇감이 한 차례 큰 먼지를 일으키고 숨이 끊어지자 조용한 식사를 하는 시간처럼 너무나 조용하기만 했다.


동이 트고 승현 아버님과 누나 아름이 그리고 여러 명의 시민들과 함께 차디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 느끼는 겨울 바다 추위에 섬찟 놀라며 ‘아, 이렇게 추운 바다 속에 아이들이 있었다니, 나는 잠시도 버티기 힘든데 이 차디찬 바다 속에 침몰한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애타게 엄마 아빠를 찾았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나는 그렇게 차가운 바닷물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2015년 2월 23일 우리 일행은 팽목항으로 출발 하였다. 이 날을 위해서 준비해온 광목천과 세월호 모형배가 팽목항에 도착해 있어서, 인양 퍼포먼스를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해 내면서, 그리고 아직도 저 깊은 바다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아홉 분의 실종자들을 생각하면서, 아버님과 아름이, 그리고 이번 고행의 길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은 매서운 새벽 바다바람을 맞으며 인양 퍼포먼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실을 인양하라!

선체 훼손 없이 세월호를 인양하라!


그렇게 인양 퍼포먼스를 마친 후 바로 승현 아버지와 아름이의 3보 1배가 시작 되었다. 함께 해주신 시민들과 함께 2015년 2월 23일 그렇게 시작 되었던 3보 1배는 어느 덧 한 달을 넘기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이 고행은 아직도 길 어디에선가 계속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짊어 지셨던 십자가의 길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일까? 다가오는 부활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는 것 보다는 내가 보고 싶어 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이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부활을 맞이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박준호(바오로) : 수원교구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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