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홀로 세속살이 농사꾼으로 살아온 정호경 신부가 뼈를 깎는 듯한 올곧은 정신으로 성경의 1,500 구절을 찾아 묵상하며 목판에 새긴 단상집이다. 이 단상집은 하느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어우러진 자아발견의 자화상을 현실에 접목시킨 전각성경책이기도 하다.
저자 정호경 신부는 사제 급여를 거부한 채 낮에는 자연과 벗하며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성경구절을 나무에 새기는 작업과 틈틈이 짬을 내어 설국, 채근담, 햄릿을 번역했다. 외딴 비나리 마을에서 다리가 셋뿐인 개 반달이와 함께 자유의 몸으로 살아가는 특이한 성직자다.
인류 역사에서 '성경' 만큼 많이 읽히고, 세상에서 큰 영향을 꾸준히 준 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성경'은 만남의 이야기이며, 하느님의 마음과 고난 받는 백성의 마음이 만나는 길목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이다.
이해인 수녀는 산골에서 노동하는 사제가 열심히 기도하며 새겨 낸 성경말씀들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말한다.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마음속 깊이 새긴 저자의 전각성경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 곳곳에 널리 퍼져 새겨지고 부패를 몰아내는 소금이 되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요즘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세계 각국의 살인 행위, 그리고 가난한 이웃 나라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길 때 가슴 한 편이 뭉클해진다. "이방인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구약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오늘의 세계는 수많은 약자들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정의를 실천하라는 간단명료한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성찰하게 된다.
거짓과 불의가 득세하면 모든 관계와 사이가 소원해지고 파괴된다. 서로 믿을 수 없는 세상,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만연한 세상에서 벗어날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너희는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여라!"
국가나 법의 존재 이유는 거짓과 불의를 억누르자는 것이고, 종교의 존재 이유도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일궈나감으로써 진실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만큼 참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폭력은 필요한가?
폭력을 반대한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 26,52) 이 성경구절은 아름다운 전통의 계승인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있는 곳에는 결코 폭력의 그림자가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세계사는 불신, 분열,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레의 분단과 대립도 반세기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거짓과 불의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가담하기는 쉽다. 그저 모른 척 하고 있으면 위험은 없을 테니까. 어쩌면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극적으로 가담하면 횡재도 하고 출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과 불의를 폭로하기는 어렵다.
손해는 물론 신변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청산이 제대로 안된 사회나 교회에서는 그 피해를 대물림하고 있다.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라"
다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투명한 진리로 가득 찬 세상을 위해서 깨끗하게 드러내야 한다.
인간 사회 특히 비민주적인 사회에서는 감추고 속이고 숨고 도망감으로써 눈앞 이득을 챙기며 사회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 사회가 민주화, 투명화 될수록 들통이 나기 쉽다. 족벌체제의 승계이양과 이권다툼, 비자금 등으로 나름 곤욕을 치르는 배부른 기업들의 갑질 횡포는 사회악이다.
서로 믿고 이끌어주는 사회나 교회일수록 자기 혼자만의 세상인 양 두 손에 쥐고 놓치지 않는 소유욕은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 그 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었다." (히브4,13)
입품 팔아 사는 사람들, 즉 종교인, 정치인, 교육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말 따로 행동 따로 라는 것이다. 배고프고 외롭고 서러운 이웃은 못 본 척하면서 사랑이니 자비니 애국애족이니 남을 가르치기만 하는 입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 전체 뜻을 귀축 시켜주는 '사랑 실천'을 통해 잘못된 세상을 향한 쓴 소리가 제 목소리를 못내는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맑은 영혼과 청렴한 삶을 사는 정호경 신부의 전각성경은 말씀과 본문의 의미가 나무에 새기듯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