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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들을 부패하게 만드는 건 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돈을 악마의 배설물이라며 돈을 경계할 것을 말했다. 종교인도 인간이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다 보니 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돈에 대한 뻔한 접근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좀 다르게 종교인, 즉 가톨릭 성직자들의 부패에 대해 다뤄볼까 한다. 바로 ‘건축’과 ‘부동산’이다.
건축과 부동산이 성직자들의 부패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종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신앙을 고백하는 공간들을 갖고 있다. 유교는 향교라는 공간, 불교는 법당이라는 공간, 가톨릭과 비잔틴(동방교회)과 성공회는 성당이라는 공간, 개신교는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란 공간이다. 이슬람은 모스크(성원)가, 유다교에선 회당이란 공간이 필요하다.(물론 교회는 건물이 없어도 믿는 이들이 모여 예배를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랜 관념 속에 있는 종교는 큰 건물에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굳어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가톨릭과 비잔틴, 성공회와 개신교는 건물과 공간을 중시한다. 그러다 보니 교세가 많은 가톨릭과 개신교에선 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경쟁한다.
필자가 대학생일 때 개신교 신자인 교수가 유럽여행을 하면서 거대한 성당 건물을 보고 현기증이 났다고 말했다. 필자는 가톨릭을 몰라서 그랬겠거니 했었는데 유럽의 성당건축 역사를 알게 된 후 성당 건물을 크게 짓는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일부 개신교에선 부동산과 건축문제가 언론을 통해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가톨릭 역시 일부 교구와 단체의 부동산문제가 여러 번 언론에 보도 되었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에서 건축학자 전진삼은 건축은 전체주의를 생산하는 종속의 기계(p.211)라고 표현한다. 그래서일까.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면 몇몇 교구가 교구건물을 지을 때,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고 전례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시국미사와 거리미사를 금지했을 것이다.
전진삼 선생의 글을 하나 인용해 보면, "교회는 재화를 거두어들이는 또 하나의 창구(p.211)"가 된다. 전진삼 선생이 개신교쪽으로만 기술했지만 가톨릭도 사정이 비슷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건물을 짓는데 드는 돈을 얻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지역행정관료, 자본가들, 정치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교회가 면죄부 또는 대사부 사건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일제식민지 시절 대한가톨릭교회가 일제의 만행에 침묵하고 부역한 원인이기도 하다.
교회는 자신의 부만 생각하느라 건물 공사 주변 지역주민들과 건축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은 외면해 버린다. 본당으로 내려가 보면, 일부 사제들이 성당 보수공사와 재건축을 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돈을 달라고 한다. 물론 자기 본당이 이제 낡았고 안전에도 문제가 있으면 동의하고 돈을 기꺼이 낸다. 장애인들과 어르신, 임신부, 어린이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보태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사제와 주교들의 자기 과시적이고 무책임한 건축이다. 이 문제는 해외교구에서도 일어났다. 2년 전 브라질과 독일의 어느 교구장 주교들이 호화 건축물을 짓다가 교황청에 의해 파면 당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비록 교구장이 파면되지 않았지만 서울대교구 명동성당과 인천교구의 성모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호화롭게 만들었다.
교구만 그러한 건 아니다. 충북 음성 꽃동네는 중세 주교영주의 땅이라 불릴 만큼 음성군 땅을 많이 소유하고 건물들도 많이 지어졌다. 경기도에선 작은예수회가 건물을 크게 지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단체는 세금문제와 부동산문제로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회재단 대학의 경우는 아주 심각하다. 정부의 학교평가와 취업률에 맞춰 대기업과 지역의 힘 있는 기업들이 들어오게 한다. 총장사제와 이사장주교들은 이들과 결탁해 취업이 잘 안 되는 학과들을 폐과시키고, 취업위주로 학과와 교양을 들여오게 한다. 총장(사제든 평신도든)과 이사장 주교들이 돈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다 보니, 학생들의 동의 없이 등록금을 올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들을 차갑게 대하는 문제도 생긴다.
다시 본당으로 가보면 일부 사제들이 자신들의 편의에 맞춰 보수공사를 하거나 성당을 재건축하는 일도 많이 있다. 지금은 나아지긴 했으나 본당 신자들에게 권위를 행사해서 본당 공사를 하도록 한다. 그러다 보니 있어야 할 이동약자 편의시설은 아예 안 만들거나 만들어도 이동약자들을 배려하지 않게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다시 만들기는 불가능해서 그대로 애물단지가 돼버린다.
공사를 끝마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고, 몇 억대 빚은 신자들에게 떠안게 한 뒤 발령 가버리는 무책임한 사태도 있다. 교구장 주교는 무슨 생각으로 그 사제를 급하게 발령냈을까. 교구장 주교들에게 바라건대, 공사 중인 본당에 있는 사제들은 공사를 모두 마치고 발령하고, 공사에 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발령 내지 마라.
사제들은 보수공사와 재건축을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보수공사를 하려면 먼저 제대로 된 이동약자 편의시설을 만들길 바란다.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 가난한 사람들부터 먼저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하라. 자기과시적이고 출세지향으로 본당을 빚더미에 앉게 하지 않길 바란다.
신학교에 바라건대 신학생들과 부제들에게 필수적으로 건축에 대해 교육시켜라. 될 수 있으면 신학생들과 부제들을 가톨릭성당 건축현장과 개신교 교회당 건축현장에 파견해서 일하게 하라. 그래야 함부로 공사를 해서 무책임하게 본당을 빚더미에 앉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당 신자들은 먼저 이동약자 등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라. 순명이란 이유로 무조건 본당사제 말을 듣지 말고 왜 안 되는지 말하라. 진정한 순명 또는 존중은 말을 잘 듣는 것만이 아니라 어른이나 성직자들에게 책임있게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성직자들을 부패시키는 건 돈만이 아니다. 본당을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무책임한 자기과시적이고 출세주의적인 건물건축이다. 돈을 가져오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치우치게 되고 주교가 되거나 교육에 몸담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혹한 반복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신자들에게 빚더미에 앉게 하거나, 돈을 얻기 위해 부자들만 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동약자들에게 냉혹하기만 한 성당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3,18)
부디 건축에 대해선 신중하고 엄격한 교회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란다. 꼭 큰 성당건물이 아니어도 작은 시골공소나 거리의 한 공간에서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아름다울 것이다.
참고문헌 : 전진삼 외,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