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소리 때문에 글을 쓰게 되다
흔한 말로 3월은 약동의 계절이다. 꽃샘추위도 실은 약동의 다른 이름이다. 꽃샘추위가 어느덧 시샘을 거두면 만물은 바야흐로 약동의 기지개를 켠다. 그래서 3월은 새 생명의 계절이다.
대한민국의 3월은 삼일절로 시작한다. 만세소리로 3월이 시작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3월은 더욱 약동적이다. 3월 내내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도 가능하다. 일찍부터 만세소리를 들으며 3월을 살고자 했다.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상기하는 정신을 늘 유지하고자 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민, 민주시민의 장엄한 도리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1967년 3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시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청소년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소리를 들었다. 삼일절 기념 방송이었다. 나도 만세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책방에 들어가 <현대문학>이라는 문예지를 처음 만났다.
책장을 여니 ‘제1회 장편소설 현상공모’라는 사고(社告)가 나와 있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그 사고를 종이에 적었다. 문방구에서 원고지를 한 권 사 가지고 들어왔다. 그 날 밤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면서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4월 10일, 1080매의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탈고와 함께 탈진이 왔다. 며칠 동안 끙끙 앓았는데, 누님이 포장을 하여 현대문학사로 보냈다고 했다. 그 소설은 ‘당선후보’까지 올랐다가 결국 낙선이 되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작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그 후 무수히 낙방을 거듭한 끝에 정확히 15년 후인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등단의 꿈을 이루었을 때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떠올렸다. 삼일절의 만세소리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었고, 글쟁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상기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다.
1975년 모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넣었다가 또 한 번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다. 소설을 썼을 때는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긴급조치가 발동되는 등 언로가 통제되는 시대상황 때문에 은근히 불안했다. 불안감이 적중한 듯이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신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몇 년 후 그 신문사를 출입하는 선배 작가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됐다. 심사위원들이 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는데,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편집국장이 비토를 해서, 문학담당 기자가 최종심에 오른 4편중에서 다른 한 편을 선정하고 세 분 심사위원의 양해를 얻어 심사평을 써서 올렸다는 얘기….
결국 1970년대 중반의 유신독재, 언로가 막힌 시대상황으로부터 오는 피해를 나도 고스란히 겪은 셈이었다. 시골에서 근근이 생활하는 작가지망생으로 민주화 투쟁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유신독재에 저항하며 살았다. 신문사 편집국장 데스크에서 밀려나는 소설을 썼을 정도로, 나 역시 청년 시절부터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눈과 귀를 열어놓고 살았던 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신독재 시절의 상황들, 1976년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도 명확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나는 5공 군사정권 초기인 1982년 어렵사리 등단의 꿈을 이루었고, 비록 변변찮은 문사일망정 ‘양심의 눈’을 지닌 작가로 살아가려고 올곧게 노력해왔다. 비록 큰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늘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상기하며 작가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한해 3월을 살면서 다시 한 번 가져보는 생각이다.
명동성당에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
지난 1일 아내와 함께 명동성당을 찾았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40주년을 기념하는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40년 전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을 기념하면서, 40년 후인 오늘 또다시 민주구국선언을 하는 자리라고 했다.
두 가지가 다 중요했다. 내 기억에도 명확한 40년 전의 그 사건을 기념하는 것도 중요했고, 40년 후인 오늘 또다시 ‘민주구국선언’을 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97년 전 3‧1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것도 중요했다.
1919년의 3‧1만세 운동이 있었기에 1976년의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이 있었고, 오늘 2016년의 3‧1민주구국선언도 있는 것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97년 전 3‧1혁명이 세계만방을 향해 외쳤던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40년 전 3‧1민주구국선언이 깨우쳐준 ‘고난의 시기에는 용기보다 강한 지혜는 없다’는 신념으로, 오늘 우리는 명동성당 이 자리에 다시 섰다”고 했다.
1976년 이후 4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엄혹했던 유신독재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많은 분들이 이승을 하직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정일형 선생, 이태영 변호사, 이우정 선생, 문익환 목사, 서남동 목사, 이문영 선생, 안병무 선생, 윤반웅 목사, 김승훈 신부 등은 그리운 이름이 됐다.
법정과 감옥 현장에 있었던 문동환 목사, 신현봉 신부, 이해동 목사, 문정현 신부, 장덕필 신부, 함세웅 신부와 중앙정보부에서 고초를 겪었던 김택암 신부, 안충석 신부, 양홍 신부 등은 현재 생존해 있는데, 이들 중에서 함세웅 신부와 안충석 신부를 다시 뵐 수 있었다. 그리고 40년 전 그날의 명동성당 현장에 함께 했던 인천교구 원로사제 김병상 몬시뇰과 대전교구 원로사제 이계창 신부도 오랜만에 다시 뵙고 반가움을 나눌 수 있었다.
2016년의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는 명동성당 현장에는 10여 명의 개신교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천주교 신자들과 일반 시민들 수백 명이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40여 명의 사제들의 미사를 공동 집전했고, 사제단 대표인 김인국 신부가 주례를 했다.
김인국 신부는 “우리 헌법의 계절은 늘 봄”이라고 했다. 헌법 안에 3월과 4월이 명문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3‧1혁명과 4‧19혁명의 주역은 청년들이었음을 상기했다. 하지만 시대의 심장이며 내일의 주역인 청년들이 겪는 오늘의 참상을 뼈아파했다. 그리고 헌법 안에 명시되어 있는 3월과 4월 정신을 훼손하려는 음모들을 질타했다.
미사를 마무리하면서 주례사제 김인국 신부는 40년 전 명동성당 현장에 함께 했던 원로 사제들을 모두 제대 양 옆에 서게 한 다음 모든 신자들‧시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민주주의 만세!” 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역사발전’의 경험들을 기억하자
40년 전 명동성당 현장에 함께 했던 사제들은 오늘 모두 은퇴 사제, 또는 원로 사제로 불린다. 40년 전에는 30대였을 것이다. 나는 20대 후반 시절이었다. 40년 전 그날에는 명동성당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2016년 오늘은 명동성당 현장에 함께 하고 싶은 열망이 내게 있었다.
사사로운 얘기지만 대대적인 치아공사 관계로 죽으로 연명하며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니 불편함이 컸다. 반가운 분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니 미안함 때문에 절로 굽죄이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 명동성당에 있었다.
40년 전이나 오늘이나 거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40년 전의 현장감을 일정 부분 오늘 실감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40년 전의 일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40년 전 그날처럼 오늘 또다시 민주구국선언을 한다는 사실은 정녕코 비극적인 일이었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에게는 역사의 큰 전환점들이 있었다. 박정희 사후 1980년 ‘서울의 봄’도 있었고, ‘광주민주화운동’도 있었다. 1987년의 ‘6‧10항쟁’도 있었다.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와 민주정부 수립도 있었다. 10년 동안의 민주정부 경험도 갖게 되었고, 2000년과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들과 ‘역사발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장춘몽처럼 40년 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10년 동안의 민주정부 경험을 비롯하여 그 모든 역사발전의 실체들이 추동력을 지니지 못하고 무위가 되고 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고 암담하다.
그래서 201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 서 있는 심정은 더욱 처절했다. 40년 전 명동성당 현장에 섰던 30대 젊은 사제들은 오늘 은퇴 사제, 원로 사제가 되어 백발의 모습으로 다시 섰다. 40년 전의 그날을 상기하는 그들은 자랑스러움보다는 무안함과 슬픔이 더 클 터였다. 40년 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되돌이표 앞에서 그들은 세상의 허무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터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발전의 경험들이 있다. 민주정부 10년의 경험도 있다. 그 경험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2016년의 ‘3‧1민주구국선언’이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 1919년 3월 1일의 만세소리가 살아 있다. 1976년 3월 1일의 맥박도 이어지고 있다. 그 소중한 경험들에 대한 기억으로 희망을 가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