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안에는 수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있다. 정의와 민주, 평화와 인권 등 사회공동선을 표방하는 단체들이다. 법조단체와 학술단체도 있고,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도 있다. 그 갖가지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 총괄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아래 천정련)이라는 결사체가 있다.
1991년에 명동 전진상교육관에서 창립 행사를 가졌고, 고(故) 이돈명 변호사가 초대 대표로 기틀을 닦았다. 현 권오광 회장은 제5대로 2011년부터 회장을 맡아 5년째 봉사하고 있다 (권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와 중앙고 동기로, 학생 때는 박지만과 다투었고, 지금은 박지만의 누님과 싸운다는 농담도 한다).
천정련에는 현재 7개 단체가 회원단체로 참여하고 있다. 가톨릭농민회,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우리신학연구소, 인천교구 노동사목,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천주교 인권위원회, 천정련 목포연합 등이다. 또 천정련 상주연합, 가톨릭노동장년회, 가톨릭평화공동체가 참관단체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천정련에서 매년 하고 있는 일들 중 하나로 ‘천주교 열사 합동추모미사’가 있다. 천주교 신자로서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농업과 노동 현장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거나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산화한 이들을 위한 위령미사다.
18년 전인 1998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15위를 위한 합동추모미사로 시작했는데, 현재는 19위로 늘었다.
19명의 열사 중에는 <녹슬은 해방구>의 작가 권운상과 김태훈, 박승희, 이재호 등 학생운동가가 있고, 2000년대에 죽은 이로는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서 로베르토 신부, 장애인활동가 최옥란, 노동운동가 최종만, 교사 출신으로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 의장을 지낸 권종대 등이 있다.
18번째인 올해의 천주교 열사 합동추모미사는 지난 19일(목)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뒤편에 있는 ‘작은형제수도회’ 성당에서 열렸다. 그동안 서울 명동성당과 가톨릭회관, 종로성당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매년 5월 말에 미사를 지내왔는데, 올해는 작은형제수도회에서 선뜻 성당을 내주어 좀 더 쉽게 미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2009년 합동추모미사 장소는 성당이나 회관이 아닌 용산참사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와 함께 천주교 열사 19위 합동추모미사를 봉헌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유족들이 미사에 많이 참례했지만, 1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족들도 많이 별세했거나 삶의 자리가 순탄치 않은 관계 등으로 올해는 두 열사의 가족 서너 명만이 참례했다. 그래도 모든 신자들이 유족과 함께 미사 중에 열사들에게 꽃을 봉헌하니, 모두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올해 미사에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관구장인 김종근 신부가 미사를 주례했고, 작은형제회 유이규 신부, 한국 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정성훈, 이상윤 신부, 예수회 김정욱, 박종인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서영섭 신부가 공동 집전했다.
강론을 한 예수회 박종인 신부는 ‘부활의 연대성’을 강조하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박 신부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준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마르코 복음을 소개하며 “열사들이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열사들은 마실 물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았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열사들은 하느님을 닮아 있었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더욱더 그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박종인 신부는 “신앙 안에서 우리가 부활한다는 의미는 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보고야 마는 것”이라며 “우리보다 먼저 간 이분들이 우리를 부를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옆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추모의 모임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합동추모미사를 준비한 천정련의 권오광 회장은 영성체 후의 인사말을 통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불안함 속에서 투쟁이 일상화된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싸우는 장애인인권운동, 만덕지구 재개발과 같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 세월호 참사, 병상에서 수개월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 등 연대가 필요한 곳이 많다”며, “신앙 열사의 정신이 우리 삶 안에서 생명을 꽃피워내고 부활할 수 있도록 청한다”고 말했다.
나는 미사를 지내는 동안 천정련과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등 합동추모미사를 준비한 이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컸다. 해마다 천주교열사 합동추모미사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미사에 참례한 것은 올해 처음이었다.
지방(충남 태안)에서 산다는 핑계로, 또 수년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용산으로, 여의도로, 대한문으로, 광화문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정 때문에 합동추모미사 참례는 계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꼭 참례하기로 마음먹으니, 자연 월요일 광화문광장 시국미사 참례는 거를 수밖에 없었다.
천정련은 천주교 열사 19위의 영정사진을 제대 앞에 배열했다. 그리고 제대 앞에 19위 열사들의 이름을 새기면서 투쟁이나 죽음의 성격을 압축하는 한마디씩을 이름 앞에 달아놓았다.
그리고 <자비의 희년, 열사여 정의․평화․사랑의 불로 어둠을 밝히소서>라는 이름의 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는데, 19위 열사들의 약력과 간략하게나마 ‘삶과 죽음’의 내용을 소개해놓아서, 19위 열사들은 다시금 생동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정순(카타리나)은 1991년 5월 18일 연세대 앞 굴다리 위 철길에서 몸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분신했다. 시위 중에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학생 강경대의 장례 행렬을 지켜본 뒤였다. 같은 날 전남 보성과 광주에서 학생과 버스기사의 분신 시도가 있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7남매 중 장녀였던 이정순은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대신 버스안내양으로, 가발공장, 인천 한독산업에서 노동자로 살며 동생들 학비를 댔다. 결혼 뒤 자녀 1남 3녀를 두었으나, 이혼했다. 여전히 가난했고, 식당 일을 하면서 틈틈이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무엇이 평범한 주부였던 그를 분신까지 하게 했을까. 그는 분신 하루 전에 다니던 가락동 본당 사무실에 주임신부에게 전해 달라며 유서 4통을 남겼다. 이 중 ‘정치인께 드림’이란 제목의 유서에 “5,6공 죄인들은 다 내가 짊어지고 갑니다. 백골단 해체, 군사독재는 물러나시오”라고 썼다.
책자에는 합동추모미사의 독서와 복음, 기도문들과 성가들과 민중가요들도 인쇄되어 있었다. 미사의 맨 마지막 기도인 파견성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성당에서 파견성가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악보를 보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이미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노래임을 실감시켜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 태안성당에서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지내고 나서 파견성가로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신선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을 받았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주최 측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앞으로는 해마다 천주교 열사 합동추모미사에 참례하기로 아내와 약속했다.
뒤풀이 자리에도 참석하고 태안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불현듯 노무현 유스토를 떠올렸다. 합동추모미사에 노무현 유스토도 포함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또 그는 바위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얼마든지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 타살일 가능성을 논증하는 소견들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그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친구였다. 그도 포함시켜 내년부터는 20위 합동추모미사를 봉헌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