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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부조리의 조화, 염불춤의 아이러니
  • 김혜경
  • 등록 2016-06-08 10:07:04
  • 수정 2016-06-08 17: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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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어대는 걸 보니 여름인가 보다. 이맘때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리는 뻐꾹뻐꾹 소리는 참 아련하다. 뻐꾸기는 어쩌다 제 새끼 건사할 둥지 하나 못 짓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는 나 몰라라 하는 건지. 게다가 알에서 깬 새끼 녀석은 저만 살겠다고 둥지 주인이 낳은 알들을 밖으로 밀쳐내 버린다. 아무것 모르는 어미 새는 제 몸집보다 큰 새끼뻐꾸기 먹이를 물어 나르느라 여념이 없고. 하나같이 안쓰러운 이 삶들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지독한 책벌레, 말 그대로 ‘읽는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 정도면 답을 줄 수 있으려나. 소심한 방관자인 형 미쓰사부로와 대범하게 행동하는 동생 다카시가 주인공인 「만엔원년의 풋볼」.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답게 개인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방대한 서사를 독특한 필치로 섬세하게 담아냈다. 주인공 형제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한 폭력들이 어떤 식으로 다시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어떻게 재해석되고 되풀이되면서 역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형 미쓰는 아들이 장애아로 태어나고 친구가 자살하는 등 심리적 충격과 상처로 삶에 아무런 미련도 애착도 없다. 안보투쟁 때 아이들이 던진 돌에 한 쪽 눈을 잃기도 했다. 동생 다카시는 서번트증후군이던 누이동생을 꼬드겨 임신과 낙태를 하게 했고 자살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이로 인해 ‘자기처벌욕구’의 두려움(p.398)을 안고 살면서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 사람이다. 사회적으로는 만엔원년에 일어났던 1860년의 농민봉기,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벌어진 1960년대까지를 통시적으로 보여준다. 만엔원년, 형제의 증조작은할아버지는 마을의 농민봉기 주모자였다. 둘째형 S는 1945년 패전직후 조선인들과 마을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1960년 미일안보투쟁에 참여했던 다카시는 마을사람들로 하여금 조선인이 주인인 슈퍼마켓을 약탈하도록 주도한다. 형수를 임신시키고 마을처녀를 죽게 만든 그는 처참하게 자살하고 만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면 유독 쉽게 자살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은근히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나 싶기도 하다. 「만엔원년의 풋볼」도 마찬가지였는데, 미쓰의 절친이 마조히스트였는데 아주 기괴한 모습으로 죽는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체로 현세의 삶을 중시하는 일본은 죽음이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영원이나 내세 같은 개념이 약하다고 한다. 예컨대 서양에는 어마무시한 능력을 가진 유일신이 있어서 사후세계뿐 아니라 현세의 모든 삶에 일일이 개입하고 관장한다고 믿는다. 이 전지전능한 신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면 언제나 용서하는 아주 아량이 넓은 존재다. 신과 사람 사이의 이런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되어 사람들끼리도 잘못한 게 있으면 죗값을 치르고 용서를 빌고 그걸 또 받아주고 그런다. 


그런데, 일본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식의 메커니즘이 없단다. 그럼 죄를 지으면 어찌 되는가. 요즘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용서’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보니, 평생 ‘수치’를 느끼며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사느니 죽음으로 댓가를 치르려 한다는 거다. 만약 억울하다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보이는 할복을 하기도 했다. 어째 좀 섬뜩하다. 같은 동양권이어도 ‘우리 몸은 터럭 하나까지도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함부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효의 시작(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이라 했던 우리식 사고와는 사뭇 다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미쓰와 다카시가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과 죄책감, 거기다 시대, 혹은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들. 이런 불안정한 삶에 대해, 미쓰처럼 무기력하게 방관하든, 다카시처럼 또 다른 폭력으로 뛰어들든 모두 너무나 착잡했다.


자살이나 잔인한 주검, 폭력이 난무하는 탓이었는지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행해오는 전통적 마쯔리(제의적인 축제)인 염불춤에 마음이 갔다. 마을에서는 대대로, ‘포악하게 살다 죽은 사람’이나 ‘선량하지만 불행하게 죽은 사람’은 혼령으로 나타나 재앙을 가져온다(p.236)고 믿어왔다. 그래서 그렇게 죽은 이들로 분장을 하고는 하루 종일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영웅시한다. 그때 추는 춤이 염불춤이다.


만엔원년 때 봉기를 이끌었던 증조작은할아버지와 패전 후 맞아 죽은 S형, 그리고 자살한 다카시. 이들은 온 마을사람들이 느꼈을 ‘수치’를 옴팡 뒤집어 쓴 채, 평생을 숨어 살거나 죽었는데, 세 사람 모두 염불춤의 주인공 ‘혼령’이 되었다. 


골짜기마을의 백여 년 역사를 보면, 마을에 변혁을 일으키는데 핵심역할을 한 인물들은 사라지거나 죽음을 맞는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자의반타의반 사건에 연루되면서 느꼈던 ‘수치’를 모두 그에게 몰아 씌운다. 그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면을 만들어 쓰고 춤과 음악으로 그를 추모하고 추앙하는 마쯔리를 한다.


▲ 일본의 한 예능축제 (사진출처=유튜브 영상 갈무리)


흥미로운 건, 그들이 자살을 했든 타살 당했든 심지어는 마을을 떠났어도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희생양 삼아버리고는 모른 척 슬쩍 지나가면 그뿐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마을 전체가 염불춤을 통해 그들을, 사건을 안고가면서 기억하고 영웅화한다. 공동체 안으로 모든 걸 끌어안는 방식이다. 어쩌면 이런 게 일본식 용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무한히 전능한 어떤 존재를 상정해놓고는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그 존재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그게 말이 되나? 용서를 받은 건지 아닌지 어찌 안다지? 그냥 그렇게 믿으면 된다고? 글쎄…  


오히려 한바탕 춤추고 노래하면서 개인과 마을의 수치감을 마쯔리로 승화시키는 산골 사람들의 염불춤이 한결 솔직하고 멋져 보인다. 게다가 이 때 생겨나는 젊고 새로운 ‘혼령’은 마을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꼰대들의 고리타분한 서열의식을 흩어놓는다. 정체된 공동체사회에 역동성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거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아마 그들을 기리면서 심리적인 부채감 같은 걸 털어내기도 할게다. 

  

아까부터 뻐꾹뻐꾹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어미 뻐꾸기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염불춤이라도 추고 있는 걸까?



⑴ 「읽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반세기에 걸쳐 읽어온 책들을 회고하며, 오직 책으로 살아온 오에의 인생이 강렬하게 담겨있는 에세이집.


⑵ 만엔원년; 막부말기인 1860년 한 해만 썼던 일본의 연호.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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