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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태 신부의 오늘 미사 (15.05.10)
  • 이균태 신부
  • 등록 2015-05-11 15: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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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소신 있는 지식인들이 고전을 읽자고, 철학을 다시 공부하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무슨 돈이 되느냐고,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콧방귀만 흥 하고 껴댈 뿐이었다. 


더군다나, 2014년 4월 16일 이후, 그 지식인들조차 결국은 대부분 말밖에 없는 속물임이 다 까 발겨졌다. 2015년, 이 땅에서는 오직 돈밖에 모르는 « 돈 놈 »과 나 밖에 모르는 « 나뿐 놈 »이 득세할 뿐인 것 같다. 이러한 마당에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관을 부르짖는다는 것이 과연 씨알이나 먹힐까? 진리,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사랑 등, 인류가 추구해 왔다는 정신적인 가치들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 옆집의 개가 짖어대는 소리처럼 여겨지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막막함과 절망감을 온몸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참으로 불편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 서로 사랑하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는 나의 계명입니다 »라는 말씀들은 참으로 비루하게 들린다. 


신앙인조차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말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인들만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 그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형편을 눈 여겨 본다면, 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 현실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하기 때문이다.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이 말씀도, 차라리 « 손해 볼 짓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친구 사귀려면, 먼저 그 친구 집안부터 살펴라. 영원한 친구는 없다 »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차라리 더 설득력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막막함과 절망감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다. 이 계명은 우리 시대 최후의 희망의 말씀이다. 지난 해 12월,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동료를 대신해 오너의 딸의 행패에 원칙대로 대응한 사무장을 지지하기 위한 대한항공 동료들의 그 어떤 집단행동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너 일가가 행해 온 그간의 만행을 일거에 바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대한항공 직원들은 깊이 침묵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오너 일가의 만행에 대해 그 어떤 대한항공 직원들도 맞서지 않았고, 홀로 회사와 맞서게 된 사무장을 지지하기 위한 파업도 없었다. 


을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질을 성토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더 깊숙이 고개를 처박으며 복종을 다짐한다.


그런데, 그 사무장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 « 내가 이 싸움에 나서는 건, …..나의 존엄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다 ». 자발적 복종이 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세상에서 홀로 일어서서 나는 이제 아니라고 말하는 그 사무장은 자발적 복종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둔하기 보다는 그 사람 인생 종쳤다고 한다. 그러나 홀로 된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그래서 « 서로 사랑하라 »는 말은 « 연대하라 »의 또 다른 말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은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흔히 가장 무서운 사람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사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다. 


힘없고, 겁 많고, 약하디 약한 사람일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함께 이 세상의 논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 세상의 논리,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그 논리,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그 논리,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것이 더 낫다는 그 논리, 기억하는 것보다는 잊는 게 더 살기 편하다는 그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오직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들밖에는 없다. 


이 사실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분,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그분은 «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기 이 자리에 왜 있는가? «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라는 슬로건 아래, 악마와의 거래를 틀려고 하는 사람들, 먹고 살기 위해 영혼을 팔고, 나라를 팔고, 몸을 팔고, 자식을 팔고, 예수를 팔고, 하느님을 파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거슬러, « 그래도 사랑 »을 노래하는 사람,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 사람,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 사람,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 »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것이다.


성당 문 밖만 나가면, 싫어도 마주쳐야만 하는 « 환장 »할 현실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달콤한 말, 위로의 말이라도 성당 안에서 들으면 살아갈 희망이라도 생기고, 살아갈 기쁨이라도 생길 텐데, 자꾸만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현실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분노한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발적 복종,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자발적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 왔다. 노예가 되어 편안하게 주인이 던져 주는 푼돈이나 챙기며, 종종 주인의 발길질과 갑질을 견디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인 양 여겨온 이 시대에, 그 자발적 복종에 고개를 치켜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붙은 만국 공통어는 빨갱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리는 그들을 도와주는 일, 그래서 우리들도 더 이상 자발적 복종이라는 상태에 머물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 서로 사랑하자 »다. 


« 서로 사랑하자 », 이것이야 말로, 죽음으로 점철되는 세상에 저항하고, 죽음에 저항하고, 불의에 저항하고, 거짓선동에 저항하시는 부활과 생명의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업이다.


덧붙이는 글

이균태(안드레아) :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복산성당 주임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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