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8주간 토요일 (2026.5.30)
: 유다 17,20ㄴ-25; 마르 11,27-33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일이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학적 추론으로나 과학적 증명 방식으로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로나 또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룩되지 않는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일어날 때라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왔다는 유다인들에게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어야 일으킬 수 있는 기적들을 그분이 숱하게 일으키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어도 막상 예루살렘 성전의 질서를 통째로 부인하는 듯한 소동을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을 때 성전을 관리하던 수석 사제들과 성전 최고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율법 학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다짜고짜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만의 하나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제거해야 할 위험 인물로 지목하고 이런 물음을 했던 것이고, 이는 사실상 예수님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는 결의가 숨어 있었던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되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29)
하늘의 권위를 유다교의 이름으로 행사하고 있던 그들은 이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를 군중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불신하고 배척하는 이방인들 속에서 선교하던 사도들의 환경이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도는 그나마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가십시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유다 17,17.20-25)
교우 여러분!
오늘날 신자유주의 풍조 속에서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깨달음이 생기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일은 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의 상황이 잘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어도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부유하고 힘 있는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고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처신이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인가요? 아니면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식인가요?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선택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성화시켜 나가야 할 지가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