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이면 미적지근한 선풍기 바람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연신 얼음물을 들이켠다. 밤사이 조금 가라앉았던 땀띠가 삐질삐질 흐르는 땀 때문에 목 언저리 여기저기 벌겋게 다시 솟는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가려운 목을 벅벅 긁어대다가 그야말로 불현듯, ‘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예사로 수단삼아 부리고, 사람까짓것 아주 우습게 여기는 이런 세상에, 느닷없이 ‘사랑’이라니. 이거 아무래도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지 싶다. 아님 사랑이라도 흥청망청 생각하면서 이 더위를, 고달픈 이 삶을 잠시 잊고 싶었던 걸까.
냉커피를 한 사발 타다놓고는 「슬픈 카페의 노래」를 다시 읽는다. 마술 같은 사랑의 힘으로 카페가 시작되면서 황량했던 마을이 희망과 활기를 얻지만, 사랑이 떠나면서 카페도 퇴락하고 마을도 다시 황폐하고 무료했던 과거의 생활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사랑이 뭘까 깊은 울림을 주면서 되짚어 보게 한다. 거기다 故 장영희 교수의 문장력이 워낙 빼어나 읽는 내내 번역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직접 쓴 글 같다.
주인공 아밀리아 에반스는 골격이나 근육이 남자 같은 육척 장신에다 사팔뜨기다. 그녀는 재주가 뛰어나 곱창과 소시지, 사탕수수 당밀, 시럽 등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거면 무엇이든 만들어 팔아 재산을 불린다. 특히 그녀가 만든 위스키는 짜릿하고 화끈한 기운이 영혼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줄 만큼 최고다.
어느 날 그녀의 가게에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떠돌이 꼽추 라이먼이 흘러들어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밀리아는 이 작달막한 거지를 사랑하게 된다. 사팔뜨기지만 건장하고 부유한 그녀가 뜨내기 꼽추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사랑, 참 모를 일이다.
아밀리아는 뻣뻣하고 퉁명스러운 자신과 달리 사교적인데다 말도 잘하는 라이먼과 함께 카페를 시작한다. 그녀의 멋진 술과 음식으로 카페는 나날이 번창해서 사람으로 북적인다. 주말이면 이웃마을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다. 카페는 삶과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주는 공간이 되어 온 마을을 환하고 여유롭게 만든다. 그런데 라이먼은 자신에게 아버지의 유품까지 내어주며 아낌없이 헌신하는 아밀리아의 사랑을 뻔둥대며 즐기기만 한다. 감지덕지해도 모자를 판에 말이다.
아니, 사랑이란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는 일이어서 두 사람 상호간에 주고받는 행복하고 내밀한 소통 같은 거 아닌가? 그렇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런 건 어쩌면 사랑을 주는 이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의 경험을 돌아봐도 그랬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이 자꾸만 나를 비껴가고 있음을 느끼곤 했으니까. 그래서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을 한다는 게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한 일인지. 고통스러운 건지.
저자인 매컬러스도 말한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사랑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 수도 있다.” (50쪽)
그렇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공동 경험이라 해서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이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롭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온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49쪽)
세상에나. 매컬러스의 말처럼 아밀리아의 마음속에도 오랜 동안 ‘사랑’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고, 라이먼은 문득 그 사랑을 일깨우기만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밀리아는 ‘온.힘.을.다.해’ 자신의 사랑을 그녀의 ‘내면에만’ 머무르게 했어야 했다는 건가. 그러나 그게 말이 되나. 가당키나 한 말인가 말이다. 사랑을 감춘다는 건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저절로 넘쳐흐르는 감정은 말과 행동으로 눈짓으로 표정으로 온통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불행히도 아밀리아의 사랑을 비웃기라도 하듯, 꼽추는 마빈 메이시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메이시는 한때 아밀리아를 열렬히 사랑해서 선량해지려 노력했고, 비록 열흘간이지만 그녀와 결혼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혼이 뭔지 몰랐던 아밀리아는 함께하려는 메이시를 때리며 쫓아버렸고, 그 바람에 그는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잘생긴 미남이지만 성격이 포악했던 메이시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 다시 돌아왔는데, 라이먼은 그를 보자마자 완전히 빠져버린다. 물론 메이시는 꼽추를 귀찮아하고 함부로 대한다. 이런 그와 아밀리아가 한판 붙은 대결의 날, 라이먼은 메이시를 도와 그녀를 쓰러뜨리고 카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함께 도망쳐 버린다.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뜨겁게 사랑했고, 아밀리아는 라이먼을 사랑하고, 라이먼은 메이시를 사랑하고…이들의 엇나간 사랑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사랑이 본래 그런 거라고?
푹푹 삶듯 밤낮 무덥기만 하더니 이제 열대야도 조금 누그러졌고 아침저녁이면 제법 견딜만해졌다. 머지않아 햇살도 바람도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 오겠지 기대하면서 ‘사랑’이라도 해야겠는 사람이 있다면, 단단히 각오하고 시작할 일이다.
아밀리아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흘러넘쳐서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랑을 퍼붓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대상은 누구든, 어떻든 상관없다. 거기에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차갑게 등을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내가 사랑을 주었던 이의 마음속에도 오랜 기간 사랑이 쌓여왔고, 그 사랑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폭발한 것이리라. 그 역시 한심해 보이는 인사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에게 넋을 잃었을 수도 있다.
사랑을 하려거든 이 모든 외로움과 절망을 감수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사랑의 고리에 엮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하되 온힘을 다해, 그 사랑을 내면에만, 오직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이래도 저래도 쓸쓸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해질 무렵 가까운 공원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천천히 걸으면서 아름다운 저녁놀이나 실컷 바라보고 바람이나 흠뻑 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