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가족과 함께 서산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근래 본 국산 영화는 <내부자>, <암살>, <베터랑> 등인데, 이번에 본 영화는 <터널>이다.
<터널>을 보게 된 계기는 다소 특이하다. 개봉 당시 <터널>에 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SNS에서 이용남이라는 이의 글을 보고 최초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용남은 청주대 객원교수이며 영화비평을 하는 보수 진영의 논객이다. 나는 그의 글을 보수 논객 조우석이 주필로 일하는 <미디어 펜>의 ‘페북’에서 읽었다. 이용남의 <터널>에 관한 글은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터널>이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디테일, 세월호 참사와 연결되는 구도에 대해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 상황을 암시하는 발상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논조를 보였던 것 같다.
나는 이용남의 글 덕분에 국산영화 <터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영화에 대한 호기심,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똬리를 틀었다. 은근히 조우석과 이용남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다. 글 내용과는 상관없이, 난생 처음 보수 논객의 보수적인 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니 슬며시 우습기도 했다.
이런 묘한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용남에게 감사한다는, 이용남의 글 때문에 <터널>을 꼭 봐야겠다는 발언들을 SNS 상에서 접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많기 마련이다. 어느 누구의 비판적인 글이나 혐오감을 유발하는 행동 때문에 그것의 동기나 대상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것의 일례를 최근의 국회 풍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 내용에 대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집단 반발이 그것이다. 정 의장의 개회사가 진행되는 도중 다수의 새누리당 의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항의했고 퇴장을 감행했다.
‘헬조선’이라는 터널, 관심이 모일 때 끝난다
그 후 지도부를 포함한 40여 명이 의장실에 몰려가 국회의장에게 사과와 사퇴, 사회권 반납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기국회를 전면 거부하는 의장실 앞 농성으로 돌입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집단 항의 장면과 농성 모습을 많은 국민이 TV로 볼 수 있었다. 국회의장의 개회사 내용보다도 새누리당 의원들의 항의 장면이 집중 보도되는 양상이었다.
그 바람에 의장의 개회사 내용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저리도 난리를 치는 것일까? 집단으로 고함을 지르고, 의장의 개회사를 ‘테러’라고 부르고, 정세균 의장의 이름을 병균에 빗댄 그 이유는 대체 뭘까? 자연적으로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 내용은 관심사항이 됐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과격한 행동, 집단 반발이 없었다면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국민들은 개회사 내용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갔을 터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집단 반발 때문에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 내용이 좀 더 소상히 알려지게 된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세균 의장으로서는 고마워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우병우 민정수석과 관련한 논란은 국민 여러분께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국민의 공복(公僕)인 고위공직자, 특히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티끌만한 허물도 태산처럼 관리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실질적으로 검찰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그 직을 유지한 채, 검찰수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중략)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최근 사드 배치와 관련한 정부의 태도는 우리 주도의 북핵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떠나서 우리 내부에서의 소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한 주변국과의 관계 변화 또한 깊이 고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됨으로 해서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응분의 제재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남북이 극단으로 치닫는 방식은 곤란합니다."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권고’하는 대목과 ‘사드 배치’에 관한 비판, 그리고 공직자비리수사처(아래 공수처) 신설을 촉구한 내용이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 반발한 이유였다.
국민들은 국회의장의 발언과 새누리당 반발의 불균형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 개회사 내용이 그토록 난리를 칠만큼 큰 문제가 되는 걸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개회사 내용이 잘못 되었거나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점을 짚어 조목조목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옳다.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게 순리이며 성숙한 태도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 반발한 것은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 내용이 틀려서라기보다는 국회 수장이 정기국회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청와대를 비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옳은 말 자체에 대한 반발이며, 아픈 구석을 찔린 것에 대한 반사적 행동이다.
우리나라 집권 여당의 수준이 그 정도의 유치함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국민의 눈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권력자의 눈치만 살피는 행태다. 나는 영화 <터널>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과 사회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16년의 대한민국은 붕괴 직전의 터널 속을 위태롭게 지나고 있다. 1,825km에 이르는 긴 터널이다. ‘헬조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터널인데, 현재 1,387km 지점을 지나고 있다. 438km 가량 남았다. 4분의 3이 지났으니 끝이 보인다. 끝이 보인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며 희망이다. 막판에 '변혁의 역사'가 생겨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