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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태 신부의 오늘 미사 (15.05.17)
  • 이균태 신부
  • 등록 2015-05-18 15:02:57
  • 수정 2015-05-18 17: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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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셨다 »는 이 말은 ‘그러면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들판에 나가 두 팔을 벌려본 사람은 안다. 자기 몸을 감싸고 있는 빈 공간들이 모두가 다 하늘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 몸의 한 부분인 발이 닿아 있는 거기가 바로 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하늘로 돌아가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몸 곁에 계시는 분, 당신의 이름인 임마누엘에 온전히 충실하신 분으로 현존하신다는 말이다.


사실, 예수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그분의 승천을 믿고, 기념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또 하나의 예수가 된다는 말과 같다.


20세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증거한 분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말한다. 킹 목사님은 미국 흑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신 분이다. 흔히 미국이 평등사회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비백인들, 백인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은 사회적인 차별을 암암리에 많이 받고 있는데, 1964년까지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인종 차별법이 공공연히 있어서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다. 식당이나 공연장에 흑인을 못 들어가게 하거나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재판이 있어도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패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5년, 한 흑인 여자 재단사가 시내버스 백인 좌석에 버티고 앉아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여자 재단사는 인종 차별법을 어긴 죄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는다.


그때 킹 목사님은 흑인 민권주의자들 모임을 결성하고, 버스회사가 흑백 분리주의를 취소할 때까지 시내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의한다. 일 년이 넘게 버스 안타기 운동을 벌이자 결국 버스회사는 어쩔 수 없이 흑백 좌석구분을 없애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킹 목사님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흑인차별 주의에 계속 저항해 나갔다.


1960년에 킹 목사님은 아틀란타의 어느 백화점 식당에서 흑인과 백인이 따로 식사해야 하는 것에 항의하던 젊은 흑인들과 함께 체포 당하기까지 했는데, 그 이후로 목사님의 생애는 협박과 투옥으로 이어진다.



1963년에도 흑인 지지자들과 함께 백인만 출입하는 바에 들어가서 농성을 하고 데모를 하다 투옥된다. 같은 해 8월 킹 목사님은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 100 주년을 맞아 워싱턴 링컨 기념관 앞에서 대대적인 평화행진을 주도하고 25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 이라는 제목의 연설이었다. 그 연설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 우리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는 이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자손과 과거 노예를 소유했던 사람들의 자손이 형제를 맺는 테이블에 함께 자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찌는 듯이 더운 사막의 미시시피주조차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4명의 어린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 자신의 피부 색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격에 의해 판단 받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앨라배마주가 어린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에 손을 맞잡고 형제 자매로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계곡은 높아지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질 것이며, 거친 곳은 평편하게 되고, 구부러진 곳들은 곧게 펴질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드리워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


킹 목사님의 노력 덕분으로 1964년 미국 의회는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민권법을 통과시키지만 많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그분을 위협하고 협박한다. 그리고 5년후 테네시주 멤피스 시에서 백인 저격범의 흉탄을 정통으로 맞고 숨을 거둔다. 그 때, 그분의 나이 불과 서른 아홉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길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을 이어서 가난하고, 고통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을 빌면, « 가난한 교회 »가 되는 것이다.


« 가난한 교회 »와 «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는 분명 다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는 교회에 가난한 사람 돕기라는 명분과 재산 증식이라는 실리를 동시에 안겨 줄 수 있다. 가난을 사람을 도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가난한 사람 돕자는 데에는 어떤 정치적인 색깔 논쟁도, 윤리적인 선악문제도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프리카 난민이나,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기들 영상을 보여주면서 후원금 요청을 하는 광고는 왜 그들이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 왜 아기들이 굶어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는 가난을 낳는 구조나 세력에 대한 비판을 삼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 가난한 교회 »는 가난한 이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며,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한 교회다.


그저 마음의 평안을 바라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힘듦과 삶의 무게를 주님께 모두 다 내던져 버리듯이 송두리째 내어 맡기고, « 알아서 하시오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그저 헌금 열심히 내고, 교무금 열심히 내고, 미사 시간 내내 장엄한 얼굴을 한 채, 한 순간의 방심이나, 분심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아니다.


또, 자신의 삶이 왜 이 모양 이 꼴밖에 안되느냐고 푸념과 원망을 그분께 쏟아 내거나, 혹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서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듯, 그분에게 억지를 부리며 기도하기만 하고, 손도 까딱 안 하는 것도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을 현세의 부귀영화나 현세의 복을 누리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하셨지만, 그 제자들의 삶은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삶이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으면, 부귀영화나 복을 누리는 식의 구원을 받기 보다는 고생 바가지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 한방에 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진리와 사랑의 힘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사랑과 진리의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 가난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며, 교회에서 vip 대우를 받는다는 것,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 죽음으로 점철되는 문화 속에서도 생명을 부르짖고, 잊어 버리고 가슴에 묻어 버리자는 달콤한 유혹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증거하는 길이다. 이 길은 분명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길이 구원에로 이르는 길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순간순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또 실제로 잠시 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사랑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구원은 어떤 지점에 다다랐을 때에 누리는 영광이 아니다.


마치 등산을 할 때에,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 느끼는 감흥이나, 가슴 뭉클함만이 구원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모든 순간, 땀이 비 오듯이 온몸을 다 적시고, 때로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그래서 무릎이 깨어져 피가 흐르더라도, 때로는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까 하는 유혹을 겪으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한번 가보자고 다시금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는 그 순간 순간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 순간 순간들이 바로 구원이다.


오늘도 그 구원의 길 위에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그 순간순간들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그들과 함께 웃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그들과 함께 통곡하며,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신다.


덧붙이는 글

이균태(안드레아) :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복산성당 주임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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