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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7-08-04 17:02:31
  • 수정 2017-08-04 17: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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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다니 7,9-10.13-14) 해설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저자는 역사를 다스리고 심판하는 신비스러운 분을 보여 준다. 이 ‘연로하신 분’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당신 활동을 중개하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계신다. 모든 사람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책들’은 열려 있다. 이제 심판이 시작된다. 알렉산드로스 제국, 특히 안티오쿠스의 제국을 상징하는 네 번째 짐승이 심판을 받는다. 신비스런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영원히 이어질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충실한 백성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본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신비스런 사람의 아들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시편(96) 해설

주님은 임금이시나이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시나이다


이 시편은 뭇 나라의 우상들을 무너뜨리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찬양한다. 경신례에서 백성은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 계시면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개입하려고 나타나신 사건들을 기념한다.


정의를 이룩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상숭배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느님의 백성은 기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활동을 통하여 뭇 나라 우상들의 거짓됨을 폭로한다.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사건들은 백성에게 희망찬 앞길을 열어 준다. 백성은 그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제2독서(2베드 1,16-19) 해설

<사도들은 자기네 눈으로 본 사실만을 전한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하여 말하면서, 당시의 거짓 스승들은 터무니없는 복잡한 이론들을 꾸며 냈다. 그와는 반대로, 사도들은 자기네 눈으로 본 사실만을 전한다. 17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암시한다(참조 마태 17,5).


자기들이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는 이단자들은 이성 없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신자들은 이단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단자들을 가려내는 기준은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속이는 일을 밥 먹듯 하는 그들의 악한 행동과 활동이다. 그들은 돈에 탐욕이 많고 여자를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믿음은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도들이 본 바를 믿고 예언자들의 말을 믿는다. 성경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한 말이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각기 자기 표현방식대로, 자기 시대의 관습에 따라, 쓰는 것이 좋다고 보이는 바를 썼다. 성경의 각 저자는 자기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 ⓒ 최진


복음(마태 17,1-9) 해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당신 부활을 나타낸다>


예수님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투쟁은 박해와 죽임을 당하는 실패로 끝나겠지만, 결국 부활의 영광에 다다를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라는 표현은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모세는 율법을 가리키고 엘리야는 예언운동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기쁜 소식에서 가장 알아듣기 힘든 대목은 성공과 승리가 반드시 실패와 패배를 거치게 되어 있다는 가르침이다. 증오와 불의를 싸워 이겨 내는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만 사랑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가르침이다. 죽이는 세력과 목숨 걸고 싸워야만 살리는 세력이 승리를 거둔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패배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실현해 가는 메시아이시다. 불의한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려다가 반란범으로 선고를 받아 죽임을 당한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는 실패와 패배를 거쳐서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차지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천진하게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신 예수님과 한없이 함께 있었으면 하고 소원한다. 고통을 당하거나 죽지 않고 그런 황홀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두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당부하신다. 방금 본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당신이 죽임을 당한 끝에 부활하신 다음에야 공적으로 드러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묵상


영광스러운 빛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산에서 ‘아들’의 영광이 뜨겁게 타오르는 빛이 되어 비친다. 그 빛은 불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덤불 빛(탈출 3,2),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거룩한 불길이다. 그 빛은 첫 새벽 여명이다(창세 1,3).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빛이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던 빛이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탈출 34,29) 엘리야 안에서도 빛이 빛났다. 엘리야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엘리야는 불 수레에 실려 하늘로 불려 올라갔다(2열왕 2,1-13). 주님을 위하는 열정으로 불탔다(1열왕 19,9). ‘불같은’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는 최고의 신현(神顯) 앞에서 당신과 함께 있다. 시나이-호렙 산의 이 두 예언자 가운데,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라 사십 주야를 있으면서 하느님의 영광 중에서 영원한 법을 받았으며(탈출 24,18), 엘리야는 사십 주야를 걸어서 하느님의 산인 호렙 산에 다다랐다(1열왕 19,8). 모세는 하느님의 친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사고 청했다(탈출 33,18). 엘리야는 부드러운 미풍이 지나가는 앞에서 얼굴을 가린다(1열왕 19,7이하). 율법의 대표 모세와 예언자들의 아버지 엘리야가 새로운 시나이와 새로운 호렙에서 증인이 되어 예수님과 더불어 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예수님의 변모에서 요한이 자기 복음서 서언에서 한 말이 드러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 영광은 하느님의 빛나는 초월적인 나타나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빛이 빛난다(참조. 요한 1,15).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동방 교부들이 보는 예수님 변모


▲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 변모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타볼 산.


14세기 그리스 신학자요 주교였던 그레고리오 팔라마스에 따르자면, 타볼 산의 빛은 창조된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빛이다. “세 위격 안에서 유일한 본성을 지니신 분의 형언할 수 없는 광채다” 예수님의 변모는 아버지 및 성령과 공통으로 가지고 계시는 신적 본성의 영광 속에서 종의 모습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나타남은 또한 삼위일체의 신현이기도 하다. “아버지께서, 당신 목소리로,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심을 증언하셨다.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빛을 발하는 성령께서 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공통적인 빛이심을 가리켜 보여 주고 계신다”


영적 생활의 종착점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되는 데 있다. 동방의 영성 대가들은 영적 생활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사도들이 거룩한 산에서 겪은 체험과 비슷한 체험 안에서 절정에 다다라야 한다. 구원의 경륜은 그 전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일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그리고 그 영광은 성삼위의 내적 완전하심의 계시요, 반영이요, 옷이다.


사람이 순종, 기도, 참회의 길을 통하여 온전함에 도달할 때, 그 사람의 몸에서는 예수님 변모의 영광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광채로 비춤을 받은 온전한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당신 변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산 위에서 빛나던 빛은 부활의 빛을 앞당겨 보여 준다. 예수님의 변모는 현세의 시간을 넘어서서 부활의 시간,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예수님의 변모는 역사의 종말을 계시해 준다. 역사의 종말은 산고의 고통으로 울부짖는 세계의 전적이고 결정적인 변모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변모 때 타볼 산에서 나타난 빛은 당신이 두 번째 오실 때 나타날 그리스도의 영광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비잔틴 전례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오! 구세주님, 당신은 타볼 산에서 모습이 변했나이다. 당신이 영광 중에 무섭게 다시 오시는 순간 장차 우리 변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성인들은 성령의 빛으로 변한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의미를 성령께서 채워 주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비잔틴 전례의 또 다른 본문은 이런 뜻으로 노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 변모로 인간 본성 전체를 거룩하게 비추신다. 창조주님께서 우리 이성을 거룩하게 하신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나뉘지 않고 변하지 않은 채 두 본성이 합하여 사람이 되어 머물러 계신다. 오늘 성령께서는 타볼 산에서 말할 수 없는 모양으로 빛을 쏟아 부어, 예수님의 몸에서 당신 신성의 광선이 쏟아지게 하신다”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시나이의 신현에서처럼(탈출 19,16), 구름으로부터 울려나온다. 세 명의 청중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밝힌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들어야 할 분이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빛과 구름 속에서 겟세마니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겟세마니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이는 내 아들이다!” 그때 아들은 “아빠!” 하고 부를 것이다. 


변모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만 계신다. 날마다 보던 예수님, 결정적인 영광에 다다르려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예수님께서 거기 계신다. 마르코 복음서 전체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사는 일이 수난의 길을 거쳐야만 가능함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능함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그들은 변모의 의미를 깨닫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신비다. 부활의 영광으로부터 비추어지는 고통의 신비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독서·복음



제1독서(다니 7,9-10.13-14)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았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시편(96)

주님은 임금이시나이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시나이다

  

제2독서(2베드 1,16-19)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복음(마태 17,1-9)

<그 얼굴이 태양같이 빛났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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