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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 -김혜경] 20세기 헬조선의 인디언 섬머
  • 김혜경
  • 등록 2017-11-13 12:29:06
  • 수정 2017-11-14 1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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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여자」1, 조선희, 한겨레출판


올해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이 무렵이면 눈부신 햇살도 어째 좀 쓸쓸해 보인다. 하필 이럴 때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촘촘하게 엮어낸 「세여자」를 읽게 되었다. 마치 다큐를 대하소설로 읽은 느낌이다. 생생하게 그려지는 혁명가들의 험하고 빛나는 삶과 죽음에 마음이 저렸다. 


냉전시대를 지나면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역사연구와 여성인물연구가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었고, 이때 가려졌던 사회주의 계열의 자료들도 쏟아져 나왔단다. 거기서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았던 허정숙(1902-1991)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들여다보니 주세죽(1901-1953)과 고명자(1904-?) 같은 매력적인 신여성들이 함께 있더란다.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그녀들은 각각 조선공산당의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박헌영과 임원근 그리고 김단야의 애인이자 동지였다고 한다. 


조선희는 지금까지 묻혀있던 그녀들의 삶을, 이들이 막 스무 살 남짓이던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철저히 복원하고자했단다. 드라마틱했던 세 여성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이며, 일본의 식민지배와 해방 전후,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등 격동의 한국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십여 년 가까이 기자였던 작가답게 수많은 논문과 단행본, 신문 등의 자료를 섭렵했단다. 소설에 몇 년 몇 월 며칠로 나오는 일들은 실제로 있었던 팩트이고 이름이 나오는 등장인물도 삼월이를 제외하곤 모두 실존 인물이란다. 그러면서 ‘소설이 역사적인 사실을 찢고 나가지 않도록 삶과 삶 사이를 메운다’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1920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주세죽과 허정숙이 상하이에서 만난다, 당시 그곳에는 김구나 안창호 같은 민족주의자들과 여운형이나 김규식 같은 진보인사들, 조선 공산주의의 원조라 할 이동휘 등이 있었다. 또 생애 마지막 20년을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이회영과 신채호가 만주와 북경에 근거지를 두고 상하이를 드나들던 때다. 공산주의를 일제만큼 싫어했던 김구가 맨 오른쪽, 독립투쟁을 하려면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안창호가 가운데라면 러시아혁명에 기대를 걸었던 여운형이나 안병찬 이동휘는 왼편이었고 김만겸 같은 소련 태생의 정통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세죽과 정숙은 상하이로 공부하러 갔던 대부분의 조선청년들처럼 공산주의 운동가가 되었다.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와 싸우고 일제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과 계급이 평등하다 했으니 혁명은 무산자계급과 식민지민족을 동시에 해방시켜줄 강력한 힘으로 느껴졌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국제주의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분명 매혹적인 케치프레이즈(1권 p39-45)였을 게다.


▲ 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사진출처=한겨레출판)


주세죽은 상하이 사회주의연구소에서 만난 박헌영과 결혼 했는데(1921) 훗날 모스크바에서 여러 상황 때문에 박헌영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단야와 같이 살게 된다(1934). 그러나 스탈린의 공포정치아래 일본 첩자로 몰린 김단야는 총살 당하고, 그녀는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외롭게 유형살이를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고명자는 세죽과 정숙이 정종명 정칠성 등 선배여성운동가들과 결성한 조선여성동우회(1924)에 참여한다. 거기서 김단야와 연인이 되었고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와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체포당한다. 모진 고문 끝에 전향서를 쓰고는 친일잡지 기자노릇도 하고 여운형을 돕기도 했다는데 이후 기록이 없어 한국전쟁 중 사망했으리라 추정한단다. 


허정숙은 일본 고베 유학을 거쳐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다시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유학하다 경성으로 돌아오는 등 삶의 스케일이 남달랐다. 중국으로 들어가서는(1936) 남경과 무한, 연안, 태항산을 거치며 조선의용군으로 무장항일투쟁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고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 조선의용군들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으로 구십 세 까지 북한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 사망했는데 여러 남자와 연문을 뿌리는 등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당당하게 살았다. 투철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의 콜론타이⑴라 불릴 만큼 그녀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그러나 박헌영, 최창익, 임화, 이태준 등이 숙청당한 후에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오래도록 산 것을 보니 아마 현실주의자가 되어 독재체제에 적응했었나보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로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제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세 여자의 삶과 함께 해방을 기점으로 ‘분단’이라는 민족 비극의 씨앗이 된 역사와 시대도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38선 분할점령이 점점 영구 분단 쪽으로 흐르는 와중에도 분단을 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만, 남에도 북에도 그것을 현실화시킬만한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게 몹시 아쉽다고 말한다. 


우익은 반탁, 좌익은 찬탁으로 갈라선 와중에 그나마 신탁통치에 대해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사람은 여운형과 송진우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운형 같은 이는 왼쪽에서는 기회주의자에다 미군정 프락치라고, 오른쪽에선 빨갱이에 박헌영의 꼭두각시, 김일성의 하수인이라고 공격을 받았단다. 


당시 반탁운동은 말 그대로 해방공간의 모든 현안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었다면서 반탁구호는 과거에 친일을 했어도 그 죄를 사해줄 만큼 주술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반탁은 애국을 인증하는 무조건적인 증표였다는 거다.


이와 함께 우리가 김구와 이승만, 여운형 등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한다. 김구는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독립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해방이라는 공간에서 한국역사에 끼친 공과를 냉정하게 따진다면 아집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깎아내린 부분도 있었다는 거다. 김구는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도 결사반대했고, 마지막 테러(1947)를 포함해서 여운형에 대한 테러 몇 건은 그가 배후라는 소문이 파다했단다. 임시정부시절 백범은 오른손으로는 정치를, 왼손으로는 테러를 해서 항일투쟁의 별이 되었지만, 해방 후에도 동족과 자신의 정적을 상대로 계속 두 손을 동시에 썼다(2권 p.182)는 거다. 


한편 북한의 김일성은 무리하게 한국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영리하게 위원장자리를 지켜냈고 스탈린키드였던 그는 ‘주체’를 내세우며 공포정치를 펼쳐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저자 조선희는 김일성의 주체사상(1955)이 나오고 연안파까지 숙청되면서(1956) 한국의 공산주의는 종료되었다면서,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 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고 진단한다.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수많은 세 여자와 남자들이 살았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2권 p.370-371).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위해 영하 20도를 밑도는 한겨울에도 상하이로 모스크바로 떠났고 역사와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가족과 애인,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렸다. 그네들 자신의 삶을 통째로 역사에 던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전 세계적으로 힘을 뻗치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채 한 세기가 바뀌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소련의 시월혁명(1917)이 유럽 사회에 이런저런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는 등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단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공산주의세계를 행복하게 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니, 역사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얼마나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는?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만만찮다. 주변국들은 또 다른 얼굴을 한 제국주의 같다. 해방공간에서 시작된 이념과 분단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걸핏하면 정치적으로 갈라져 서로 핏대를 올리고 습관적으로 이념을 잣대로 편을 가른다. 


어찌해야 우리사회가 제국주의 데자뷔에서, 이념과 분단이 덮어씌운 트라우마와 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언제고 좌우를 한번 확 섞으면 가능해지려나.



⑴ 콜론타이(1872-1952):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로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제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후에 외국에서 근무하게 된 소련의 첫 번째 여성 외교관이 된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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