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987>을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서산에서 보았고 한 번은 태안문화원의 ‘작은 영화관’에서 보았다. 지난해부터 태안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해준 태안문화원에 감사한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본 까닭은 감동의 반복과 명확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30년 전에 온몸으로 겪었던 1987년의 풍경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영화를 만든 분들에게 감사지정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1987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도 각별한 해로 기억된다. 우선 나이 마흔이 꽉 찬 나이에 결혼을 했고, 첫 아이를 얻었다. 1월에 결혼하여 11월에 아이를 낳았으니, 속도위반도 하지 않고 정확히 실력발휘를 한 셈이다…
여름에 ‘가톨릭농민회’ 태안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서산과 해미, 합덕, 신례원 등지를 다니며 다른 지역 농민회와의 연대를 공고히 했다. 상급 농민회로부터 입수한 1980년 5월의 광주 참상을 담은 비디오를 태안성당 신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독일인 기자가 몰래 찍은 그 비디오를 태안성당에서 공개하는 문제로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7년의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그해 가을에는 서산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대 대통령선거 공정선거감시단 서산군지부를 결성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태안성당에 공정선거감시단 태안본부 사무실을 두고 태안 쪽 활동을 총괄 지휘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한다. 우선 당시 태안성당 강당의 원래는 재래식 부엌이었던 빈 공간을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선처해준 박연호 신부께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 크다. 박연호 신부는 훗날 환속을 한 탓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어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태안성당에 공정선거감시단 태안 사무실을 앉히자 신자 아닌 이들도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고, 대학생들이 여럿 찾아와서 몸으로 뛰는 활동을 맡아주었다.
공정선거감시단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의 당선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사실상의 목표였다. 그러려면 전두환·노태우 쪽의 부정선거를 감시하고 차단하는 것이 필수였다. 정말이지 공정선거감시단은 부활한 직선제 속에서 군부독재 정권의 연장을 막아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상위 조직에서 내려오는 것은 갖가지 유인물과 포스터뿐이었다. 돈은 한 푼도 내려오지 않았다. 모든 경비는 자체 조달로 해결해야 했다. 태안성당 박연호 신부님과 나중에 고인이 되신 사거리 ‘국민약국’ 정한문 선생을 비롯한 여러 아는 이 모르는 이들이 경비를 보태주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도 살림 비용을 줄여야 했다.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점심값과 버스비만 주고 포스터와 유인물을 안겨주고 내보낼 때마다 어깨를 두드려주고 안아주기도 했다. 단원들은 포스터를 붙이고 주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다가 동네 어께들의 방해를 받기도 했고, 누군가가 주민들에게 몰래 돈 봉투를 건네지는 않나 감시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태안성당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 앞에는 삭선리에 사는 송인만이라는 농민회원의 소형 트럭이 있었다. 어디에서 무슨 연락이 오면 그 차를 가지고 긴급 출동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의 집권을 막아내려는 민주세력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양 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이 가져온 결과지만, 양 김의 분열은 군사독재세력의 책략의 결과이기도 했다.
제13대 대통령선거 투표일(1987년 12월 16일) 우리는 밤 9시쯤 노태우의 승리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명이 태안성당 공정선거감시단본부 사무실에 모여 비탄에 젖어 있었다. 연탄난로의 불이 꺼져 가는데도 아무도 연탄을 갈지 않았다. 한 여대생은 눈물을 흘리며 혼잣말을 했다.
“박종철과 이한열을 꼭 살리고 싶었는데….”
오늘도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을 부른다
영화 <1987>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해 12월 16일 저녁 태안성당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 여대생의 눈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대생이 중얼거린 “박종철과 이한열을 꼭 살리고 싶었는데…”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영화 <1987>를 처음 볼 때는 눈물을 꽤 흘렸다. 두 번째 볼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 또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젊은 시절 얼마나 그 노래를 많이 불렀던가. 노년기에 접어든 시절에도 저 강변에서, 서울광장에서, 대한문과 광화문광장에서 얼마나 절절한 소리로 불렀던가.
그때로부터 30년이 흘러 세상은 많이 변했다. 세상이 변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세월만으로 세상이 변한 것은 아니다. 영화 <1987>이 담고 있는 그런 처절한 과정들을 거쳐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는 언제나 유효하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10년 동안 어느 정도 민주주의 학습을 이루었지만 너무도 허무하게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 동안 민주주의는 무참히 훼손되고 말았다. 더구나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너무나 흠모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유신독재를 부활시키려 했으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 동안 각계각층에 도사린 ‘적폐’는 독재와 부정의 실체다.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에 잠식해 있는 갖가지 불의와 부정을 도려내고 씻어내는 일이다.
‘적폐청산’의 과정에서 나는 다시금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영화 <1987>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오늘도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