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서 올해는 읽고 쓰기에 조금 더 집중해봐야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눈에 띈 책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언어의 힘이 얼마나 크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을까만,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게 글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 덕분에 누구나 SNS에 글이나 사진을 올릴 수 있고 포털로 뉴스를 보고 댓글도 달고 그러는 요즘은 더 직접적으로 글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그럼 활자화된 글은 어떨까? 어쩐지 글을 삭제하거나 수정도 할 수 있는 화면 속 글자보다는 신문기사나 책처럼 활자화된 글이 더 팩트 같고 진짜로 느껴진다. 특히 기사를 다루는 기자는 뭣보다 투철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카타리나 블룸처럼 멀쩡한 사람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블룸이 잃어버린, 아니 빼앗겨버린 그녀의 명예. 성실하고 진실했던 사람, 따뜻한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자존감도 높은데다 책임감도 강했던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 그렇게 스물일곱 해를 열심히 살아온 블룸이 질 나쁜 여자에 살인자까지 되고 말았다.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 싶은 일이 떡하니 벌어졌다. 딱 나흘 만에.
전쟁에서 폐인이 되어 돌아왔던 아버지와 알코올중독자 어머니 그리고 행실 나쁜 오빠까지. 블룸은 불우한 가정을 벗어나려 스무 살 남짓 결혼했지만 기대와는 다른 결혼생활에 후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한다. 독립한 블룸은 가정관리사로 일하는데 맡겨진 일을 아주 성실하고 똑똑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그녀를 고용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가족처럼 집안일을 몽땅 믿고 맡긴다. 그녀 모르게 도움을 주려고 기꺼이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기까지 할 정도다.
이런 카타리나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카니발이 시작되는 전날인 수요일 저녁. 블룸은 그녀의 대모이자 오랜 친구인 엘제 볼터스하임 부인의 집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 참석한다. 거기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첫 만남이지만 둘은 곧 가까워진다.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블룸의 아파트에서 같이 밤을 보낸다. 루트비히가 수배자임을 알게 된 블룸은 경찰 몰래 그가 자신의 집을 빠져나가도록 도왔고 이 때문에 경찰에 연행된다.
그런데 황색언론 <차이퉁>의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는 애초부터 카타리나 블룸을 강도의 정부라 단정 짓고는 그 둘이 오래전부터 연루되었을 거라며 이 사건을 대서특필한다. 또 그녀의 고용주인 블로르나 부부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마련할 수 있었던 블룸의 아파트를 도당의 아지트라는 둥 무기거래 장소라는 둥 추측성 기사를 마구 써댄다. 언론의 기본이 사실 확인 아닌가? 하지만 퇴트게스에게 그런 건 아예 관심 밖의 일이다. 확인은커녕 블로르나가 블룸에 대해 영리하고 이성적이라 했던 말을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라 각색한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블룸의 아파트를 몇 차례 찾아와 값비싼 반지를 선물하고 편지도 보냈던 신사가 있었는데, 그는 싫다는 그녀에게 별장 열쇠를 억지로 쥐어주며 한 번쯤 찾아오기를 은근히 바랬던 슈트로입레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말판 <존탁스차이퉁>에는 거꾸로, 블룸이 막무가내 신사의 별장을 찾아다녔던 여자로 기사화된다. 명망 높은 신사를 망치라는 좌파그룹의 지령을 받았다는 거다. 권력과 돈을 손에 쥔 슈트로입레더의 압력이 작용한 탓이다.
카타리나는 경찰에서 심문받을 때 했던 말들이 공공연히 밖으로 흘러나가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내용마저 완전히 다르게 와전되어 신문에 실리는 것을 보면서 점차 공포에 휩싸인다.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기네는 물론이고 언론을 상대로도 소송을 하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자이퉁>은 불과 하루 이틀 만에 블룸의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어머니와 수감되어 있는 오빠의 범죄행위마저 모두 그녀 탓으로 돌려 버린다. 사실 블룸은 죽은 아버지의 묘소를 돌보는 비용과 어머니의 치료비를 감당하고 있었고 오빠에게 영치금도 보내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뿐만 아니다 야밤에 그녀의 집으로 전화해 추잡한 소릴 지껄이는 남자가 있는가하면 우편함에는 성인용품 관련 광고지들이 수북하게 쌓인다. <자이퉁>의 거짓기사들 때문이다. 수요일까지만 해도 블룸에겐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지저분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흥밋거리를 찾아 선정적인 기사를 제멋대로 꾸며 실어대는 저널에 휘말릴 대로 휘말려버린 블룸. 그녀는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자기가 아껴온 아파트의 깨끗한 벽에다 마구 내던진다. 더군다나 퇴트게스는 심각한 암수술을 받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낸다. 말리는 의료진을 따돌리고 숨어 들어가 기어코 인터뷰를 따냈고 그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죽고 만다. 이 모든 게 수요일 저녁 댄스파티 후 목, 금, 토 겨우 사흘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결국 <자이퉁>의 퇴트게스와 해명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한 일요일, 불안과 두려움, 무엇보다 분노에 가득 찼던 블룸은 능글맞게 다가오는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수한다.
물론 카타리나 블룸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신사의 별장 열쇠를 루트비히에게 건네고 도주를 도운 건 잘못이다. 그에 상응하는 처벌은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리고 송두리째 뿌리 뽑아도 괜찮을 만큼 그렇게 큰 범죄는 분명 아니다.
그럼 그 깔끔하다는 블룸이 어떻게 범죄자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느냐고?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만, 우선 루트비히 괴텐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도망자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이제 스물일곱인 사람이 마음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나 오랜만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는데, 그를 위해 뭔들 못 하겠는가. 루트비히 역시 위험한 도피 중에도 블룸에게 전화를 걸어오고 체포된 후에도 그녀는 아무 상관없노라 항변했다니 아마 그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푹 빠졌던 모양이다.
황색저널이 만들어내는 가짜뉴스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블룸이 참 안쓰러웠다. 졸지에 한 개인을 처참한 지경에 밀어 넣고도 뻔뻔하기 그지없는 권력과 경찰, 언론의 견고하고 거대한 어둠의 구조가 섬뜩했다. 스스로 살인자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블룸이 천번만번 이해됐다. 속 시원한 홀가분함도 느꼈다. 그러면서 너무나 씁쓸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자이퉁>의 독자였다면 어땠을까? 나 역시 많은 대중 속에 섞여 블룸에게 손가락질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알게 모르게 심어진 선입견으로 블룸을 살인강도범의 도피 행각이나 돕는 그렇고 그런 여자,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철지난 공산주의자 아류쯤으로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문득 태극기집회에서 함부로 남발하던 수많은 가짜뉴스들이 오버랩되었다. 그러면서 무턱대고 활자를 믿지는 말아야지 다시 생각한다. 활자가 교묘하게 부리는 검은 마법, 그 어두운 초능력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퇴트게스가 죽자마자 바로 그 뒤를 이어 다른 기자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자이퉁>. 이 무서운 시스템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