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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오르한 파묵식 자기정체성
  • 김혜경
  • 등록 2018-02-14 11:14:33
  • 수정 2018-02-15 18: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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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은 한파가 유난스럽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으니 맹추위가 고마운 건가 싶기도 하다. 뭣보다 세계적인 스포츠행사에 북한이 참석해 참 다행이다. 여자아이스하키팀 선수들 개개인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다니 더 뜻 깊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드는 생각, 남이건 북이건 내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었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남이었고 북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의 삶을 택할 수 있다면? 그것도 지금 이대로의 내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대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해서 살 수 있다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생각거리를 주는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나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천체학과 수학, 물리학에다 그림까지 공부한 스물셋 젊은 학자다. 어느 날 배를 타고가다 터키 함대에 나포되어 이스탄불에 노예로 끌려간다. 나는 배웠던 지식을 총동원해 의사인 척 했고 터키에는 아직 서양의술이 전해지지 않은데다 운도 좋아 파샤의 눈에 든다. 


이후 놀랍도록 나와 똑 닮은 호자에게 넘겨지는데, 그는 지적 호기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나에게 학교에서 배운 모든 걸 가르쳐 줘야 한단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여러 학문은 물론이고 갖고 있던 책에 있는 내용들 모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전부를 알려 달라 요구한다. 


머리도 좋고 열의도 대단한 호자는 이탈리아어로 된 나의 책들을 불과 여섯 달 만에 모조리 읽어버렸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빠르게 익힌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만큼 배우고도 여전히 뭔가 허전함 같은 걸 느낀 호자는 ‘나는 왜 나일까?’를 묻는다. 그건 자신만이 알 수 있다 하자 나더러 증명해 보이라며 글로 쓰란다. 나는 노예가 되기 전까지 좋고 나빴던 추억들을 쓰면서 호자에게도 지난 일들, 나처럼 추악한 악행까지도 모두 써보라 부추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둘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의 삶을 시시콜콜 알게 된다. 또 우월감과 열등감을 복합적으로 느끼면서 서로를 은근히 비난하거나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잖아도 겉모습이 닮은 두 사람은 내면까지 점점 닮아간다. 아니 원래의 정체성에 상대방의 정체성이 점차 스며든다는 게 더 맞겠다. 


이즈음 도시에 급속하게 흑사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죽는다. 호자는 자신은 죽음이 무섭지 않다며 두려워하는 나를 비웃는다. 그러다 호자가 벌레에 물려 온몸에 붉은 종기가 돋자, 사실 자신도 흑사병이 무섭다고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종기가 있어야 한다는 듯 내 몸을 살핀다. 나에겐 반점이 없는 걸 보고는 같이 거울을 보잔다.

 

“그때 나는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을 보았다. 우리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p.105) 내가 머리카락을 만지자 호자도 아주 재빨리 머리카락을 만진다. 내 시선, 움직임들, 두려움과 공포심까지도 마치 거울처럼 노련하게 흉내를 낸다. 호자는 내가 되고자 한다. 내가 되어 베네치아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말한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파디샤는 호자에게 조언을 요청했고 나의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둘은 흑사병의 원인과 언제쯤 전염병이 물러날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일로 호자는 파디샤의 신임을 얻어 황실점성술사가 되고 호사를 누린다. 우리 둘의 노력에 대한 보답을 호자만 실컷 즐기는 것 같다. 그의 생기발랄한 생활이 몹시 부럽다. 내가 호자였으면 좋겠다. 


낙심하던 차에 파디샤는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호자에게 모든 걸 가르친 걸 알고 있단다. 그와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하다며 이런저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다. 한편 호자는 파디샤의 명령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집안에 틀어박혀 연구에 골몰한다. 나는 호자대신 호자가 된 듯, 궁을 드나들면서 온갖 유희와 파티를 즐긴다. 흥청망청 먹고 마셔 목살이 늘어지도록 살이 찌고 행동도 눈빛도 흐리멍덩해진다. 그래도 어쩐지 나는 이런 삶이 싫지 않다. 


그러는 동안 호자는 책상 앞에 앉아 무기연구에만 몰두하며 지낸다. 학문에 빠져 열정적으로 지내던 젊은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파디샤조차 집에 있는 호자가 나라고 말할 정도다. 무기력했던 호자를 내가 변화시켰단다. 이제 호자와 나는 누가누군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다. 마침내 호자는 괴물 같은 신무기를 완성한다. 그렇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나와 호자는 마치 꿈을 꾸는 듯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한 ‘하얀 성’을 본다. 언덕 저 높은 곳에서 새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돕피오 성. 그곳에서는 우리를 위해 황홀한 축제가 열리고 있을 것 같고 둘은 그 멋진 축제에 꼭 참석해야만 할 것 같다. 어두운 숲에다 더러운 늪, 험난한 바위투성이 비탈이 높다랗게 가로막고 있지만 두 사람은 ‘하얀 성’을 향해 나아가야함을,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게다가 파샤들이 이교도인 나 때문에 전쟁에 졌다면서 불길한 나를 죽여야한다고 쑥덕거리기까지 한다. 이를 눈치 챈 호자와 나는 새벽어스름 과감히 옷을 바꿔 입는다. 호자는 베네치아로 들어가 내가 되어 나의 삶을 이어가고 나는 호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무슨 변신 게임이라도 하듯, 나는 호자가 되어가고 호자는 내가 되어간다. 급기야 호자는 나로, 나는 호자로 아예 삶을 바꿔서 살게 된다. 그럼 여기(터키)에서 호자로 살고 있는 나는 호자인가 나인가? 이탈리아에서 내가 되어 살고 있는 호자는 나인가 호자인가? 호자가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다 알고서, 호자처럼 생각하고 호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나는 호자일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는 호자가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호자는 나일까? 똑같다는 게 가능할까? 만약 내가 호자고 호자가 나일 수 있다면, 나를 나이게 하는 고유한 무엇 같은 건 없다는 말인가? 과연 나는 얼마만큼 나이고 얼마만큼 호자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호자로 살고 있는 나는, 되레 호자면 어떻고 나면 어떠냐고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되묻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지난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나인가에 너무 매달리거나 천착하지 말란다. 



어차피 어느 게 더 행복할지는 알 수 없으니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해나갈 건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용감무쌍하게 내가 원하는 삶을 내 안에 들이라는 말이다. 오르한 파묵은 ‘나’라는 정체성을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넓게 확장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정체성이 다채로운 만큼 내 삶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말이겠다. 


이참에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통째로 바꿔 살아도 좋을만한 본보기 삶을 찾아봐야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를 다른 누구와 완전히 바꿔 살만한 용기가 내게는 없다. 뭣보다 그런 이가 나의 삶을 부러워할 리가 없다. 그러니 우선은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본 다음 그를 닮으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그러다보면 그의 삶이 ‘나’라는 정체성 안으로 얼마쯤 스며들겠지. 그러면 언젠가 조금이나마 그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내가 될 수도 있겠지. 책속의 두 사람이 삶을 바꾸는데 이십년 넘게 걸렸으니 조바심 낼 건 없겠고. 천천히 그러나 멈추진 말고. 



파샤 : 터키에서 장군, 총독, 사령관 따위의 고관에게 주던 영예의 칭호 


호자 :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교 학교의 교사나 성직자를 의미하며, 지금은 일반적으로 지식이 넓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p.29)


파디샤 : 무굴 제국과 이란 등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칭호. 오스만왕조에서는 메흐메트 2세 이후 사용됨.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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