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너무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 1870년대 저물어가는 제정 러시아의 귀족사회가 배경이다.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1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단다. 그만큼 스케일이 크다. 큰 줄거리는 세 쌍의 남녀를 대비시키면서 톨스토이답게 도시보다는 농촌의 삶을 예찬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어찌나 생생한지 그 사람 속에 들어앉아 글을 썼나 싶을 정도다. 볼 때마다 놀랍다. 그래서 두께가 만만찮지만 한 번 잡으면 놓기가 어려운 책. 주인공격인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의 종교관과 존재론적 사색, 그의 가치관도 엿볼 수 있다.
여주인공이랄 수 있는 안나는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정열적이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숙모의 중개로 화려한 경력에다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카레닌)와 결혼해 아름다움을 뽐내며 사교계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안나는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고 일을 우선시하는 남편이 마땅찮다. 사랑도 못 느끼겠다. 그러다 모스크바 여행 중에 젊고 매력적인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러잖아도 흔들리던 안나에게 대담한 브론스키는 적극적으로 대시했고 둘은 곧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안나는 공작부인 베트시처럼 당시 러시아 귀족들이 공공연히 즐기던 비밀스런 정사는 위선이라 여긴다. 사랑하는 아들 세료자가 눈에 밟히지만 브론스키를 선택한다. 과감히 집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또 넓고 화려한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 그러나 사교계에서는 내놓고 불륜을 저지르는 안나를 차갑게 외면하고 저속하다 손가락질한다. 이후 그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면서 브론스키에게만 병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지만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데다 자신의 삶을 일일이 참견하고 구속하려 드는 그녀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법적으로 안나는 여전히 카레닌의 아내다. 브론스키와 낳은 딸 아니도 법적으로는 카레닌의 자식이다. 더 이상 세료자는 만날 수도 없다. 뭣보다 언제부턴가 브론스키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되니 신경병적으로 브론스키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의심된다. 그래도 어떻든 브론스키와 관계를 회복하고 안정을 되찾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고심 끝에 자존심 상하고 마음도 너무 아프지만 아들 세료자를 포기하리라 작정하고는 카레닌에게 이혼을 청한다. 하지만 자신의 위신이 깎인데 대해 단단히 화가 나있던 그는 안나의 청을 거절해버린다.
매사 분명하면서도 충동적인 데가 있는 안나는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브론스키의 사랑도 식어버린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어정쩡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추스를 수가 없다. 모든 게 절망적이다. 결국 그녀는 극도로 흥분해 죽음으로 복수를 하겠다며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안나의 불륜에 대한 카레닌의 복수가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복수로 이어지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불행한 사랑. 톨스토이가 첫머리에 쓴 제사(題詞)가 인상적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일이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12,19)
복수하고 원수 갚는, 그런 것 말고 너희는 ‘사랑’하며 살라는 신의 당부겠다.
안나를 둘러싼 감각적이고 슬픈 사랑이야기와 교차되면서 키치와 레빈의 순수하고 이성적인 사랑이 펼쳐진다. 레빈은 키치가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힘들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브론스키는 자기를 좋아하는 키치가 싫지 않았지만, 안나를 본 순간 첫눈에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키치와 레빈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 이들 네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인물이 돌리와 스치바 부부다. 안나는 돌리의 시누이 그러니까 스치바의 여동생이고, 키치는 돌리의 막냇동생이다.
돌리는 남편 스치바가 젊은 가정교사와 바람이 났을 때 안나의 도움으로 마음에 안정을 찾고 남편을 용서하기도 했다. 성실하고 검소한 돌리와 안나의 오라버니답게(?) 겉멋 든 바람둥이 스치바는 그 무렵 러시아 귀족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몰락해가는 귀족사회의 일면을 대변하기도 한다.
키치와 레빈의 사랑은 농촌에서 건실하게 살아가는 아주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늘 좋기만 했다는 건 물론 아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의견차가 있지만 도덕과 신뢰를 바탕으로 슬기롭게 잘 해결해 나간다는 말이다. 키치는 지난날 온천장에서 만났던 바레니카에게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사람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배운 터였다. 레빈은 워낙 완고할 만큼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톨스토이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데,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해 늘 고뇌한다. 언제나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레빈은 키치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으로 번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등등. 그러던 어느 날 농부인 표도르에게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 하느님의 율법대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한마디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데,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툭 내뱉는 표도르의 말에 레빈은 깊은 감동을 받는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분명하게 정리되는 걸 느낀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러려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뭐가 선함인지 그걸 어떻게 알지? 레빈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생각 끝에 답을 찾는다. 무엇이 선인지 알 수 있는 건 하느님이 사람 안에 이미 계시해두었을 거란다. 그러니 그걸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레빈에게서 신앙심 가득한 톨스토이를 본다.
그러면서 ‘선’은 이성이나 지성 따위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성과 지성 그 너머의 어떤 ‘느낌’ 같은 거라 말한다. 그래서 레빈은 실생활에서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다 딱 부러지게 말하기도 어렵거니와, 어떤 삶이 선한 삶인지 악한 삶인지 자신도 잘 모른다 고백한다. 때문에 여전히 별거 아닌 일에 부르르 화를 내기도 하고 주변의 식자들과 같잖은 토론도 계속 벌일 거란다. 또 자기와 생각이 다른 키치와 다투고 비난도 하고 그러다 금방 후회하는 일을 되풀이 하며 살 거라 한다.
그렇지만 레빈은 이제 그가 겪는 무슨 일이든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는, 빛나는 순간들임을 안다. 뿐만 아니라 신으로부터 받은 선함이 자신 안에 들어있을 테니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선’을 기준 삼는다면, 거기에는 신의 선함이 배어있으리라는 믿음과 자신감도 생겼다.
내게는 안나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불꽃같은 사랑을 할만한, 그런 삶을 선택할만한 용기가 없다. 레빈처럼 바른생활맨도 영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키치나 베로니카처럼 순수한 것도, 브론스키처럼 저돌적이지도 못하다. 돌리나 스치바, 카레닌을 닮은 것 같지도 않다. 아니, 어쩌면 내 안에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죄다 뒤섞여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아마 나는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런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원할 때, 내 욕망을 기준 삼아놓고는 마치 신이 내안에 계시해둔 ‘선’을 기준삼은 척, 하진 않았는지. 내 욕심을 채우려 벌인 일이면서 신의 ‘선함’이 드러나리라 맘대로 신을 뒷배삼은 적은 없었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