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5일은 칼 마르크스(1818-1883)가 태어난 지 꼭 이백년 되는 날이었다. 아직도 마르크스야?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삼성이 온갖 야비한 방법을 동원해 수십 년 동안 노조설립을 방해했다든지, 대한항공 사주 일가가 해대는 어처구니없는 갑질을 보면서 그가 더 생각났다.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어려서부터 예리한데다 고집도 세고 독선적이었다. 자존심이 강해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 해박한 사회이론가이자 혁명적인 노동운동가였던 그는 공허한(?) 관념이 아니라 지독하게 ‘사실’에 천착했던 책벌레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가 출간한 『자본론』은 사회를 과학적으로 풀어낸 역사적인 저서로 손꼽힌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는 철학과 경제학은 물론 사회학과 정치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사상과 사고가 넘쳐나던 때였다. 당시 생시몽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평등한 세상을 주장하고 있었다. 프루동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정부가 자본가들의 재산축적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경쟁’을 억제하고 상호주의적 협동 체제로 나아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처럼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 작품이 대거 발표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런 학문들을 비판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정신과 이성이 역사를 만든다는 칸트와 헤겔 등의 관념철학을 자신의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사회적으로는 영국에 이어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계급도 늘어나는 때였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축적하면서 재산을 자꾸 불려갔지만 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당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처음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영국에서는 ‘공장입법’(1833)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채 아홉 살도 안 된 꼬맹이들에게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을 시켰다. 청소년들에게도 열두 시간이 넘도록 고된 노동을 강요했다. 이런 비참한 노동 현실을 보고 분노하는 지식인들이 점차 늘어났고, 사회주의 운동도 싹트기 시작했던 거다.
마르크스는 『자본론』(1867)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소외’되는데 주목하고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본질을,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투쟁이라고 보았다.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형태의 활동이라 했다. 그러니까 노동은 행복과 해방의 정수이자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자유로운 창조적 행위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계급투쟁이 없어지면 자유로운 인간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사회화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되리라 꿈꿨다.
그런데 노동의 형태중 하나인 ‘분업’은 인간의 생산성을 지나치게 증가시켰고,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x)보다 ‘더 가치가 나가는 재화’(y)를 생산하게 했다. 여기서 차액(y-x)이 생겨나고 이 차액에서 고용주로서 가져야할 몫을 뺀다. 그러고도 남는 게 있다. 이 남는 것을 다시 땅값이나 이자 등으로 자본가계급이나 부르주아계급에게 나눠준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고 재화를 축적한다. 정작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가지려고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악순환이다.
거기다 지배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법적인 제도들을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그럴싸해 보이도록 윤색하게 한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대해 호감을 갖도록 호도하고, 착취당하는 삶이 자연적이며 바람직하다는 이데올로그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은 사회적으로도 소외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이 서로 적대시하는 갈등 관계가 기반이기 때문에, 그 안에 이미 자멸할 수밖에 없는 성격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스스로 모순을 쌓아간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결국 자본주의는 계급혁명을 통해 붕괴하고 사회주의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사회가 올 것이라 예언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어서 부르주아와 지주계급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지배하는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자고, 그러자면 ‘혁명’을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통해서만 공산주의사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마르크스는 자신의 남은 삶을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고 훈련하는데 바쳤다.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만드는 일에도 착수했고 그의 지도 아래 <공산주의자 동맹>은 급속히 성장했다. 이 조직의 신조와 목적을 문건으로 출판한 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스타로 만든 『공산당 선언』(1848)이다.
그러나 크게 기대를 걸었던 파리혁명(1848)이 실패한 후, 런던으로 간 마르크스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살림이 어려워 취직을 하려해도 유명세 때문에 일자리 찾기가 힘들었다. 걸핏하면 굶주릴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때 두 아들과 딸을 잃었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몰래 숨어 지내거나 전당포에 옷을 맡기기도 했다. 엥겔스는 이런 마르크스를 물심양면으로 평생 동안 지원했다.
그러던 중 런던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회합이 있었다(1864). 제1차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다. 마르크스가 좌지우지했던 인터내셔널은, 개인의 독자행동이나 대중 연설을 가능한 한 금지했고 모든 부서는 엄격한 규율에 따라 움직이게 했다. 이런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모습 때문에 바쿠닌을 중심으로 반대 노선이 생겨났고 급기야 마르크스는 이들을 인터내셔널에서 제명해 버렸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은 개인의 감정을 중시한 시기이기도 했다. 바쿠닌이나 라쌀레 같은 민주주의적 혁명가들은 영웅적인 투사였지만, 개인적인 느낌을 낭만적인 시로 표현할 만큼 감성도 풍부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정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가족과 엥겔스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까운 이가 거의 없었다는 걸 보니 아마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한다는 게 뭔지 잘 몰랐던 듯하다. 마르크스는 개인적인 감정에 대해 극도로 엄격했고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규율을 철저히 강조했다. 좀 극단적이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고 하겠다.
간혹 그가 주창했던 사상을 부풀리거나 혹은 너무 단순화해서 적용한 탓에 이론과 실천, 양쪽 모두에서 여러 실책을 겪기도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계급투쟁과 혁명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영국 같은 나라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미성숙했던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1917). 이를 계기로 20세기 내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에 맞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6‧25전쟁, 쿠바 핵전쟁 위기, 베트남전쟁 등 사사건건 부딪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고통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냉전시대의 여파로 남과 북이 갈라진 채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로 지금껏 남아있다.
그리고 인간의 개인적인 성향과 근원적인 욕망을 무시하고 자발적인 경제활동을 억압했던 사회주의 경제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렸다. 소련은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도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다 몰락했고(1991), 그로 인해 고전적인 사회주의도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생명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를 역사발전의 주체로 봤던 점은 높이 살만하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자본주의가 이렇게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그건 일부 가진 사람들의 리그일 뿐, 다수의 노동자들은 소외되고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간다. 빈부격차는 나날이 심해지고 장기불황에 일자리도 부족하다.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떤 지침이나 해결책을 알려주려는가.
노동자편에 서서 혁명을 호소했던 마르크스에게 직접 묻고 싶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