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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7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15 10:51:49
  • 수정 2015-08-20 1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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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가 2,22-40)





로마제국의 인구조사(루가2,1-5) 덕분에 마리아부부의 베들레헴 여행이 소개되듯, 유다교 율법 준수 덕분에 예루살렘 여행이 소개되었다. 22-24절에서 율법이란 단어가 세 번 언급되고 뒤이어 성령이란 단어가 세 번 언급되었다.


율법과 성령을, 즉 유다교와 예수를 순조롭게 연결하려는 루가의 세심한 배려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계시의 장소(루가 2,46), 예수가 가르치는 곳(루가 19,45-47), 열두 제자들의 활동장소(서도행전 3,1. 11), 루가에게 중요했다.


레위기 12장에 따르면 오직 산모만 정결을 위해 예물을 바치면 된다. 그런데, 왜 22절에서 ‘그들은’이라는 복수명사가 나왔는지 이유를 우리는 추측밖에 할 수 없다. 신생아를 산모가 곁에서 보호하고 싶겠지만, 산모의 정결을 위한 여행에 아이가 동반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의 정결보다 아기 예수가 더 강조된 단락이다. 예물은 예루살렘성전의 여인의 마당과 이사라엘인의 마당 사이에서 바쳐졌다. 가난한 산모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되었다. 24절에서 가난한 마리아가 강조되고 있다.


시메온은 위로를paraklesis 기다리고, 한나는 해방을lytrosis 기다리는 유다인의 예언자로 각각 소개되고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 lytrosis는 ‘속량’으로 번역되었지만, 나는 좀 더 적절한 단어인 ‘해방’으로 옮겼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다 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예언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남자는 위로를 기다리고, 여인은 해방을 바라는가. 고통스런 시대에 남자에게 위로가 더 필요하고 여인에게 해방이 더 필요한가. 루가는 남녀 각 한 사람씩 소개하고, 남자를 꼭 먼저 등장시킨다.(루가 1,25-38; 4,25-27; 7,1-17)


유다교 율법상 아들을 낳은 산모는 출산 후 40일간 깨끗한 상태에 있지 않다.(레위기 12,2-8) 그래서 산모는 집밖으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딸을 낳은 산모는 80일간 깨끗한 상태에 있지 않다. 남녀차별의 흔적이 성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종교인에게도 남녀차별의 모습은 자주 보인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남녀차별 의식은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것 같다. 고칠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예언자로 소개된다.(이사야 40,1-; 예레미아 31,13) 25절에서 ‘의롭고 독실하며’dikaios kai eulabes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보인다. 사람에게 독실한eulabes 형용사는 루가에서만 나타난다.(사도행전 2,5; 8,2; 22,12) 시메온은 아기 예수의 미래를 구원과 빛으로 이야기하고, 또 반대와 칼을 덧붙였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27절의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는 공동성서(구약), 유다교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사무엘의 사례를 루가가 본뜬 것 같다.(사무엘상 1,22-24)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자세는 메시아 임금에게 적절한 예의다.


시메온의 노래는nunc dimittis 마리아 찬가magnificat,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 처럼 공동성서 여러 곳에서 마치 콜라쥬처럼 모은 노래다. 교회사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저녁시간에 바쳐지는 기도가 되었다. 29절 시메온의 고백은 창세기 46,30-, 토비트 11,9를 연상케 한다.


죽음은 노예상태에서 해방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창세기 15,25; 토비트 14,2-) 31절에서 왜 백성의 단수명사laos 대신 복수laoi를 썼을까. 독일의 개신교 성서학자 Michael Wolter는 온 세상 민족을 의식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부활 이후 이방인선교의 전망이 예수 생애의 시초에서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34절에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축복하는 모습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35절에서 시메온은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찔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칼은 양날이 있는 날카로운 긴 칼 또는 한쪽 날만 있는 굽는 칼 둘 다 가리킨다.


칼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하는 단어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마리아의 고통, 이스라엘의 분열- 두 가지로 학자들의 의견은 나뉘어 있다. 어쨌든, 마리아는 '고통 받는 어머니'다mater dolorosa.(요한 19,25-)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세월호 어머니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36절에서 한나는 아세르 지파, 즉 팔레스티나 북쪽 출신이다.(신명기 33,24-) 한나의 나이가 몇이고, 얼마 동안 과부였는지 확실하진 않다. 공동성서에 미리암(창세기 15,20), 데보라(판관기 4,4), 훌다(열왕기하 22,14), 이사야의 아내(이사야8,3) 등 여자 예언자가 등장 한다.


시메온의 노래는 소개되었지만, 한나의 노래는 소개되고 않았다. 시메온은 자기 자신에 의해 스스로 설명되지만, 한나는 출신, 나이, 사회적 종교적 지위, 즉 타자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루가는 남자 예언자를 극진히 대우하고 여자 예언자를 소홀히 대접하는 것인가. 남자는 본문이라면 여자는 부록이라는 말인가. 여성신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이 루가 등 성서 저자들에게 따질 일 아닌가.


우리의 용감한 여인 한나는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는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하느님께 기도하는 적극적 예언자였다.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오늘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주교나 목사인가. 말없이 굳은 일을 다 맡으며 애쓰는 여성신도인가. 해방을 용기 있게 기다리고 참여하는 한나처럼 오늘 우리는 용기 있게 교회를 지켜야 한다.


40절에서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 세상의 모는 어린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아기 예수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식의 해설은 예수의 인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예수의 부모가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이었고, 예수는 하느님과 가까운 사이며, 유다인이 고대하던 위로자와 해방자는 예수라는 사실을 루가는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예수는 해방자다. 시메온도 한나도 해방자 예수를 기다렸다. 그리스도교는 해방을 위한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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