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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8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17 10:28:48
  • 수정 2015-08-20 12: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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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가 2,41-52)




예수의 지혜(41-50), 예수와 하느님의 연결(51-52)에 대해 전해진 두 독립된 이야기를 루가는 하나로 묶었다. 소년 시절 예수는 부모에게 인성을 배우고,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성장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예수의 변변치 않은 출신 성분에 대한 유다인의 공격에 대항하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변호하고 해명하는 배경에서 생긴 이야기 같다.


예수의 소년 시절을 다룬 복음서 저자는 루가가 유일하다. 루가는 이야기식으로 예수에 대한 신학 강의를 하는 셈이다. 논문식 수업에 익숙한 현대의 신학자들이 반성할 지점이다. 이야기가 논문보다 신학에 더 가깝다.


역사는 논문 이전에 이야기로 후대에 전해졌다. 논문 아니고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신학 할 수 있다. 신학은 철학보다는 역사에 더 가깝다. 성서는 한마디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 아닌가. 하느님에 대한 인류의 그리움을 담은 책 아닌가.


12살 유다인 남자아이가 파스카축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이 예수 당시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런 문헌을 찾기는 어렵다. 남자 성인 기준을 13살로 보는 문헌도 있고 12살부터 보는 기록도 있다. 소녀와 달리 12살 남자아이는 아직 성인 대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리스 문헌이나 유다 문헌에 12살 남자아이가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는 기록은 있었다. 알렉산더, 에피쿠로스, 모세, 솔로몬, 사무엘, 다니엘 등이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무엘은 12살에 예언을 시작했다고 한다.(열왕기상 2,12) 루가는 예수를 이런 영웅들의 반열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 아들에 대한 부모의 부주의를 변명하기 위해 어떤 성서학자들은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무리지어 순례길을 오갔다는 추측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가출한 청소년들은 어디서 어떻게 험하게 살고 있을까.


가출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클까. 어린 예수의 지혜를 자랑하려던 루가로 인해 예수의 부모는 느닷없이 몹쓸 인간이 되어 버렸다. 12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출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유다교 회당이 있지는 않았다. 46절에서 랍비 한 사람 앞에 여러 제자들이 앉아 강의를 듣는 것은 아니고, 여러 랍비들이 모여 토론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랍비들이 그렇게 모여 토론했는지 의문이다.


루가는 좌우간 예수를 랍비들 반열에 동등하게 놓으려 했다. 46절에서 예수는 스승 발치에 가까이 앉아서 듣는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사도행전 22,3).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예수는 스승의 자세로 소개되고 있다. 랍비를 didaskalos(스승)이라고 표현한 곳은 루가에서 여기밖에 없다. 예수를 랍비와 동등하게 말하려니, 루가는 먼저 랍비에게 호의적인 단어를 써야 했다.


신약성서에서 어린 남자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로 teknon얘야(48절)이 pais소년(43절) 보다 더 자주 나타났다. 여러 사람을 가리킬 ‘나’는 ‘나와 바르바나’(고린토전서 9,6)처럼 보통 처음에 나타난다. 그러나 48절에서 마리아는 예수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라는 순서를 썼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설교집에서 마리아가 여기서 남녀의 순서에 따랐다고 설명하였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페서 5,23) 라는 것이다. 그의 해설은 오늘 단락에서 그 의도와 아무 관계없다. 남녀 차별의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신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 뿐일까.


49절 ‘제 아버지의 집에’ 라는 구절은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등의 장소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아버지의 관심사에 가까이’ 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또는 ‘내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출발하여 ‘내 아버지의 관심사에 가까이’ 이동하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52절에서 예수에게 지혜sopia, 사랑karis 이란 단어가 주어졌다. 지혜와 사랑 사이에 예수는 키와 나이가helikia 더해졌다. 예수는 우리 어린 시절과 같은 성장 단계를 거쳤다. 우리에게도 예수와 같은 점이 많다. 예수는 진보하고 성장하였다.


오늘 이야기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왜 이야기가 생겨났는지 배경과 의도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초대교회 시대 유다인 지식인들은 예수의 보잘 것 없는 학력을 거론하곤 하였다.


사실 예수는 유명한 랍비에게 교육받은 적도 없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기껏 내세운 지식인이 바울 정도였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종교에서 창시자나 제자들의 학력이 그리스도교보다 더 낮은 종교가 또 있을까.


예수는 랍비에게 교육받은 적 없지만 랍비와 토론할 만큼 지혜로웠다는 것을, 그것도 성인이 채 되지 않은 12살 나이에 그랬다는 것을, 루가는 유다인에게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별다른 학력을 자랑할 수 없었던 사도들을 유다인의 공격에서 보호하고픈 의도도 오늘 단락에 담겨 있다.(사도행전 4,13)


그리스도교에서 학력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 예수는 한국처럼 심한 학벌사회에 할 말이 있는 것이다.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말이 떠오른다. 진짜 지식인은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글자도 깨치지 못한 시골 노인이 미국 유학을 거친 전문직 지식인보다 더 지식인일 수 있다. 불의한 세력에 머리를 빌려주는 고학력자를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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