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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염은경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7-26 17:36:09
  • 수정 2019-07-26 17: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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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우리 집은 늘 일이 많았다. 논농사 밭농사에 과수원을 거쳐 돼지 농장까지 어느 것 하나 사람 손 닿지 않는 일이 없었고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아빠는 자주 술로 풀어냈다. 그런 아빠와 부부싸움을 한 날이면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흙길을 걸었다. 


막내인 나는 등에 업고, 세 살 위 언니는 왼손에, 여섯 살 위 오빠는 오른손에 잡고 흙길을 걸어 엄마가 도착한 곳은 성당이었다. 시골 새댁이 속상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그 시절 성당밖에 없었다고, 엄마는 내가 스무살이 넘었을 때쯤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짧지만 깊이 있게 성실히 살아낸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우리 식구들은 꼬박 백일동안 매일 저녁 연도와 묵주기도를 했다. 그때 겨우 여덟살 이었던 나는 사람이 죽으면 원래 다 그렇게 하는건줄 알았다. 


주일엔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최우선에 최고로 중요한 일이었고 나머진 다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밥상을 차리면 밥을 먹듯이 기도를 먼저 했고 새 동전 새 지폐가 생기면 아껴뒀다가 주일에 헌금으로 봉헌하곤 했다. 


그렇다. 나에게 신앙은 밥 먹듯 하는 기도처럼 일상이었고 기자로서 작은 독립언론사에서 교회 조직의 크고 작은 문제를 취재하는 지금도 신앙은 나에게 일상이다. 


▲ 2015년 7월 제주 강정 생명평화 대행진에 참가한 천주교 의정부교구 녹양동 성당, 호원동 성당 청소년들 ⓒ 최환 의정부 지부장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주 듣게 되는 질문과 충고가 있다. ‘신자세요?’ ‘신자라면서, 내부의 일을 외부에 알려서 뭘 하겠다는거죠?’ ‘사랑이 없는 비판은 공동체를 망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와 같은 질문형 충고다. 


불편하지만 한편 고마운 질문이다. 조직으로서의 교회 안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으며 또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제보현장에서 구구절절 사연을 듣고 있자면 내가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도 변함없이 나는 ‘신자’, 믿는 사람이다. 


그런 날이면 고민이 깊어진다. 나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 주일 교중미사에 성전을 가득 채워 앉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교회운영을 책임진다는 주교님들과 나는 과연 같은 믿음으로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믿음에 관한 자조적인 질문은 항상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재확인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천년전에 살았다는 예수의 삶이 이천십구년을 사는 나의 길을 안내했고 그 길은 굽이굽이마다 ‘사랑’이라는 화두로 ‘하느님 나라’를 꿈꾸게 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 모두를 품고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새로운 우주 이야기와 그리스도교 영성을 통합하는 데 관심을 두고 영성생활에 관한 수 많은 글을 남긴 주디 카나토(Judy Cannato)는 『자비로움』이라는 책에서 종교와 사회제도의 모순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제도가 어떤 상태인지, 어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인식하고 정기적으로 신중하게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최선의 가치를 지향하며 설립된 기관이나 제도를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구도 그 어떤 제도도 그런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우리의 그림자가 불러온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개인으로서, 또 하나의 종(種)으로서 성숙해 감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최선을 다해 해결하도록 부름 받는다. 이 과정은 변환의 중요한 핵심이다.” 

- 주디 카나토(Judy Cannato) 『자비로움』 중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부터 책임을 지고 변화를 시작할 수는 있다. 우리의 그림자가 불러온 결과에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안에 변화의 열쇠가 들어있다. 


출구가 없는 미로처럼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취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속으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외친다. 공상과학영화 대사 같은 이 질문은 사실 나에겐 핵심적인 질문이다. ‘나는 왜 사는가’를 고민하는 그 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찾아가게 될 이 질문의 답은 모순적이게도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된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노예이거나 자유인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생명의 빛을 나눈다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꿈꾸며 사는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며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일이고, 그렇게 같이 살아보자고 초대하는 일이다. 


얼마 전 SNS에서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당차게 설명하는 영상을 봤다. 그 아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면서 “예수님 하느님 성령님, 세 가지 분이 있는데 그 세가지 분은 한명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근데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믿는거야”라고 흔들림 없이 설명했다. 


아이의 당찬 설명은 사람들을 웃게 했고 수차례 ‘좋아요’가 달렸다. 그런데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아이가 열다섯 살쯤 됐을 때도 그냥 무턱대고 믿을 수 있는 일로 남아 있을까, 다섯 살 때 일찌감치 거두어들인 의심은 과연 해결되어 믿음으로 자리할 수 있을까, 질문하지 않는 신앙이 신자를 성장하게 할 수 있을까. 



질문은 불편함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것만 같을 때, 어디 무엇에서부터 잘못됐는지 되짚어보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일. 그 길 가운데 분명 변화와 쇄신의 열쇠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질문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예수살이공동체 잡지 <산위의 마을> 제36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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