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의 지난 100년 역사 속에서 한국천주교회는 어떤 자리를 지켜왔는지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국 사회 100년 역사 안의 교회’ 세미나에서는 대한민국 사회가 지난 100년간 일제강점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착취를 받아왔으며, 그러한 착취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소리 듣지 않도록 해야”
기조강연을 맡은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장)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민초들과 평신도들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한국천주교회 성직자들이 독립운동을 저지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과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마땅하다”고 제언했다.
강우일 주교는 왕정의 부패와 외세 침략의 이중고를 겪고 있던 우리 민족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조약을 거쳐 3.1운동에 이르기 까지 행해온 독립운동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같은 시기 한국천주교회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생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제주교구 강평국 아가다, 고수선 엘리사벳, 최정숙 베아트리체와 같은 평신도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강 주교는 “분명 3.1운동 당시 교회의 교도권과 성직자들은 민족의 3.1운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신자들이 이에 관여하지 않도록 지도했다”고 명시했다.
강 주교는 “교회가 백성 대다수가 걷고 있는 광야의 여정, 수많은 민중이 직면하는 고통과 환난에 관심을 쏟지 않고 외면하였고, 고통 받는 약하고 힘없는 이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거부하였음은 부인할 길이 없다”고 반성하며 “이는 마치 강도를 만나 초죽음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처럼 개인과 민족이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제라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우일 주교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사라지고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와는 다른 형태지만 살아있는 것을 말한다”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과거의 역사, 우리 선조들이 살아간 역사를 우리 존재의 뿌리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강 주교는 기조강연을 마치며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주하고 살아간다면, 예수님 복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일갈했던 이야기를 하며 “이러한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한다”고 덧붙였다.
소비강박에 사로잡힌 현대 사회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떤 사용목적을 가진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노동이, 시장과 화폐의 발달에 따라 사회적인 가치가 매겨지면서 물건 또는 화폐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물신숭배(fetishism)의 태도가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동화 신부는 “이제는 자동차를 만드는 일보다 파는 일이 더욱 어렵게 된 것”이라며 “사물로서의 상품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환상으로 변화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소비는 인간의 주관적이거나 합리적 선택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인간의 욕망은 강제적으로 표출된다”면서 이 신부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사회교리 안에서 이러한 물신숭배의 태도에 어떻게 대응해왔는가를 되짚었다.
이 신부는 「사목헌장」, 「노동하는 인간」 등의 과거 교회 문건을 되짚으면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강박적 소비주의가 가져다주는 기후변화와 생태 파괴에 맞서 ‘생태적 회개’를 호소”하며 “그 배후에는 경제와 기술의 공모, 즉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 자리잡고 있다고 비판한다”고 말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에 대해 이 신부는 “과학기술이 사회적 구성물임에도 불구하고 가치중립적이라는 믿음 아래 기술의 힘, 인간의 힘으로 제약 없는 성장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설명했다.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존재, ‘여성’
김선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는 사회 안에서 소외받고 착취당해온 여성들의 문제에 집중하여 여성운동의 전반적 역사와 한국천주교회 안에서의 여성운동 역사를 소개했다.
김선실 대표는 여성인권의 문제가 유엔 세계인권선언(1948)에서부터 시작해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 협약(1979)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편적 관심을 받아왔으며, 교황 요한23세의 「지상의 평화」(1963), 「사목헌장」(1965) 및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여성의 존엄」(1988) 등에서 나타나듯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여성인권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의식이라고 설명했다.
김선실 대표는 특히 이러한 많은 국제적, 종교적 제안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제도의 변화와 의식의 변화”를 강조했다. 특히 “여성의 인권 침해는 여성을 존엄한 존재로 보지 않는데 기인한다”면서 “총체적인 여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양성평등의식 교육, 여성인권 보장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 피해 여성의 치유 및 복지서비스의 질적 향상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교구별 여성사목 전담 기구 설치 ▲교회 교육과정에 사용되는 교재들에 남녀평등의식에 관한 내용 반영 ▲교구별 사회교리 교육 확산 ▲군종교구의 군인 대상 양성평등 교육 등을 제안했다.
우리 등에 기생해온 악, ‘분단체제’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이대훈 성공회대학교 교수(평화학)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제가 분단 체제라고 주장했다.
이대훈 교수는 독일 나치의 유소년 단체인 유겐트와 대한민국 국군 행사에 동원된 유치원 악단,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는 초등학생 병영체험 캠프, 맨땅에 머리박기 등 소위 ‘군기’를 잡는 군대식 훈련, 2015년 가톨릭관동대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대학 선배가 후배들 옷을 벗게 명령하고 군가를 제창하게 한 사진 등 엽기적인 대한민국 사회 현상이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러한 군대 문화, 서열 문화 등이 군대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일상적인 강박을 갖게 만드는 분단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평화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비판의 시선으로 재조명할 때 비로소 폭력과 평화에 대한 깊은 성찰과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날 제9회 사회교리주간 겸 제38회 인권주일을 맞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세미나에는 사회교리에 관심을 가진 150여명의 신자들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