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재정개혁 행보에 맞추어,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꼽히는 성직자 성범죄 척결을 위한 신호를 보냈다.
교황은 지난 10일, 시어도어 매캐릭(Theodore McCarrick) 전 추기경에 관한 교황청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매캐릭은 2018년 신학생들을 비롯해 자신과 알고 지내던 가정의 자녀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사실이 주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기경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번 보고서의 제목은 ‘시어도어 매캐릭 전 추기경에 관한 교황청 조사 및 의사결정 보고서’(Report on the Holy See’s institutional knowledge and decision-making process related to former cardinal Theodore Edgar McCarrick (from 1930 to 2017), 이하 매캐릭 보고서)로 445페이지에 달하는 매우 방대한 양의 보고서다. 이번 보고서는 교황의 지시로 교황청 국무원이 발표한 문건이다.
매캐릭 보고서는 교황청 국무원, 주교성, 신앙교리성, 성직자성 및 주미 교황대사관 문서고에 보존된 문건을 비롯하여 사건을 알고 있는 관련자 9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했다. 특히 교황청에서 누가 매캐릭의 비위를 알고도 그를 추기경까지 만들었는지를 밝힐 것이라는데 큰 기대를 모은 바 있다.
이번 보고서는 매캐릭의 일생을 추적하여 시기별로 벌어진 성범죄를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어 구체적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아무도 매캐릭의 부적절한 행동을 증언하지 않았다”
매캐릭 보고서 총괄 개요에 따르면, 교황청은 매캐릭에 관한 고발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에도 미국 주교단의 두터운 신뢰를 방패로 하여 워싱턴 교구장에 올라 추기경에 서임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매캐릭을 추기경에 서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적절한 조사 없이 구두 경고만 내린 베네딕토 16세, 당시 미국 주교단을 이끌고 있던 이들이 모두 사건을 은폐한 셈이다.
먼저, 보고서는 바오로 6세에 의해 주교로 서품을 받은 매캐릭에 관해 대부분의 증언자들이 주교 후보자 지명 과정에서 “매캐릭을 주교서품 후보로 강력하게 추천했다”면서 “아무도 매캐릭이 미성년자 또는 성인과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증언하거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확인했다.
1970년대부터 성범죄를 저질러온 매캐릭은 메투첸 교구와 뉴아크 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받았을 당시에도 “그가 비위를 저질렀다는 어떤 믿을 만한 정보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매캐릭을 워싱턴 교구장에 임명하고, 추기경으로 서임하기 전 뉴욕 대교구장 존 오코너(John O’Conner) 추기경이 1999년 10월 28일에 교황대사관에 보낸 서한을 통해 매캐릭의 전임 교구였던 메투첸 교구와 주교회의 및 교황대사관에 사제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고 신학생들과 해변 별장에서 침대를 같이 사용하고, 그의 친척 아동들을 대상으로 아동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이 알려졌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러한 고발에도 불구하고 매캐릭을 추기경으로 서임한데에는 미국 주교들의 조직적인 은폐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요청으로 2000년 5월부터 6월 사이에 당시 주미 교황대사였던 몬탈보 대주교가 뉴저지 주교 4명에게 매캐릭에 관한 고발이 사실인지 물었을 때 주교들은 “매캐릭이 젊은이들과 침대를 같이 쓴 것은 맞다”면서도 매캐릭이 어떤 성적 비위를 저질렀다고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4명의 주교 중 3명이 교황청에 매캐릭의 성적 비위에 관해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1990년대부터 매캐릭의 비위를 은폐한 주교들의 실명을 일부나마 적시했다.
매캐릭의 뒤를 이은 메투첸 후임 교구장 에드워드 휴스(Edward Hughes) 주교, 매캐릭이 주교서품을 준 모티머 스미스(Mortimer Smith) 당시 뉴아크 보좌주교와 당시 캠던의 새 교구장이 된 제임스 맥휴(James McHugh) 주교가 매캐릭의 은폐자로 직접 거론된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보고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에서 주교들을 상대로 거짓 고발을 이용해 교회의 입지를 무너트리려고 한 것을 경험한 것이 매캐릭이 부인하는 것을 믿어주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와 더불어 매캐릭이 국제 외교 활동과 모금활동을 통해 요한 바오로 2세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이 그가 추기경까지 오르는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미국 가톨릭 매체 < NCR >은 “매캐릭이 워싱턴 교구장에 임명되었을 때 요한 바오로 2세는 벌써 22년째 교황이었고, 폴란드가 공산주의를 벗어난지 11년째였으며 오코너 추기경이 공산주의 요원도 아니었다”고 전했다. 또, “요한 바오로 2세가 오코너 추기경의 서한에 담긴 심각한 고발을 조사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매우 불리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가해자 말만 듣고 교황을 ‘은폐’에 가담시킨 교황청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교황 즉위 이후 주미 교황대사와 주교성 장관의 추천에 따라 매캐릭의 워싱턴 교구장 임기를 연장했다.
이후 2006년과 2008년 베네딕토 16세가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Tarcisio Bertone) 추기경과 국무장관 레오나르도 산드리(Leonardo Sandri) 대주교로부터 직접 매캐릭에 관한 성범죄 고발을 듣게 되었을 때, 여전히 비위 사실에 대해 증거가 제시되거나 확인된 바가 없어 교회법 재판을 개시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는 “그에게 교회를 위해 조용히 지내며 여행을 자제할 것을 지시하며 매캐릭의 양심과 교회 정신에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구두 경고만을 내렸다.
그러나 2008년까지 이미 3명의 신부가 매캐릭과 성관계를 맺거나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는 고발을 제기했음에도 미국 주교회의도, 교황대사도 이들의 고발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매캐릭의 입장만을 믿으며 적극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특히, 매캐릭과 1991년에 성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한 메투첸 교구의 신부가 매캐릭을 법적으로 고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당시 주미 교황대사 마리아 카를로스 비가노(Maria Carlos Vigano) 대주교는 이를 주교성 장관인 마크 우엘레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우엘레 추기경은 비가노 대주교에게 교구 차원에서 해당 신부와 함께 고발에 관해 조사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교황청 관계자들이 2017년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파롤린 추기경, 우엘레 추기경, 베치우 추기경 그리고 비가노 추기경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1990년대 초 익명의 서한이나 피해 신부들에 관한 문건 등 매캐릭을 상대로 한 고발에 관한 문서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며 “교황은 매캐릭이 워싱턴 교구장 임명 전에 부적절한 행동이 있다는 주장과 소문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것이 전부”라고 지적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매캐릭의 비위를 알고도 은폐했다’고 주장한 주미 교황대사 출신의 비가노 대주교의 주장에 대해서도 “2018년 전까지 교황은 우엘레 추기경 또는 베네딕토 16세와 매캐릭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뉴욕 대교구에서 1970년대 초 매캐릭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한 가정의 남아를 20년간 성폭행했다는 고발이 “믿을 만하고 실체가 있다”는 입장이 나온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각 매캐릭에 대한 조사와 조치를 단행했다.
이처럼 성직자 성범죄로 가톨릭교회와 전 세계의 공분을 일으키고 세계 각지의 성직자 성범죄가 드러나는 계기가 된 매캐릭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추기경직에서 사퇴하고 2019년 환속 조치되었다.
그는 지난 7월, 또 다시 1980년 초 그가 뉴저지 메투첸(Metuchen) 교구장으로 재직하던 때 뉴저지 해변 별장에서 다른 성직자 7명과 함께 남아를 상대로 성범죄를 “기획”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했다. 고소인에 따르면 그는 학업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10대 시절 자신을 성폭행했던 신부가 ‘우두머리’에게 이야기해보라며 매캐릭을 소개시켜주었고 그 때부터 매캐릭이 자신을 성폭행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매캐릭 보고서를 발표하며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이 사건들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 그리고 미국 교회와 보편 교회에 끼친 상처에 슬픔을 느끼며 이 보고서를 발간한다”고 밝히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2018년 8월 서한을 인용했다.
“우리 삶의 방식이 우리가 외우는 말과 어긋나고, 이를 깨달을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우리가 있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으며 수많은 삶에 가해진 피해의 정도와 중대함을 깨닫고도 제때 움직이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