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2020.1.1.) : 민수 6,22-27; 갈라 4,4-7; 루카 2,16-21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첫 날인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가모장(家母長)이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승천되신 다음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자격으로 천상 가정에서도 모성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이 천상 가정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곁에 계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가 새 해를 맞이하여 전구해야 할 으뜸가는 지향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위한 성모 마리아의 전구는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 먼저이지만, 우리 인류에게도 향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물론 향합니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자기 몫을 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천상에서 인류를 축복해 주셔야 하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가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어 주셔야 하며,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 주셔야 하고, 인류는 지상에서 평화를 해치는 전쟁과 폭력을 당장 멈추어야 하며, 그리고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인류가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선도해야 합니다.
나자렛 가정에서도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은 커다란 몫이었습니다. 우선, 아나빔으로서 살아오면서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과 전통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기본이었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생아 취급을 받기도 한 아들이 꿋꿋할 수 있도록 단도리를 하는 일도 중요했고, 오히려 이런 소외와 차별을 받아본 체험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억울하게 소외받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당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도록 아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함께 하면서 센스 있게 하느님의 권능을 행사하여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도 아주 필요했습니다. 남편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마리아께서는 생계 대책이 막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친척 형제들에게 의탁하실지언정 아들 예수에게는 걱정 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출가를 격려하는 몫도 돋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내내 함께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불신하는 친척 형제들의 성화에 못 이겨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말리러 가보기도 했었지만, 소문과 달리 믿음직한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하신 다음에는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 등 아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다른 여인네들을 불러 모아서 이들과 함께 아들과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아들이 수난하시는 순간까지 줄곧 감당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다음에도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들의 부활을 굳게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셨지만, 믿음이 흔들렸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오순절 날에 온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사도들의 모후라고 불리우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다려주시고 끝내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로 거듭 나도록 지켜보아 주시던 그분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과연 장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의 영향을 받으신 덕분에 공생활 중에 유독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행하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아예 대놓고 억압받는 이들의 희년(禧年)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루카 4,18-19). 워낙 당시에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이들을 만나는 대로 고쳐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마귀 들려 고생하는 이들을 만나시면 이 마귀도 쫓아내서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루카 4,35). 이런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을 도와주시는 일이 기본 활동이었다면, 때때로 슬픈 처지에 놓인 이들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낳아서 홀로 키우던 과부를 만나시자 그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는가 하면(루카 7,15), 아직 어린 나이에 죽은 회당장의 딸도 살려주셨습니다(루카 8,54).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어도 울며 통회하는 여인의 죄도 기꺼이 용서하여 주셨으며(루카 7,48), 그러다가 손이 모자라서 제자들을 일흔두 명이나 불러 모아 방방곡곡에 보내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그 결과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례적으로 몹시 기뻐하셨습니다(루카 10,21).
그런데 이렇듯 극심한 연민의 마음으로 백성을 도와주시던 예수님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필 안식일에 만난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때 그런 얄궂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분은 안식일에 등이 굽어 열여덟 해 동안이나 고생하던 여인이나(루카 13,12), 수종을 앓던 이를 만나신(루카 14,4) 적이 있었는데, 비록 안식일이었지만 주저 없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평소에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던 바리사이들로부터 안식일 계명을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받으시고 난처해지기도 하셨지만, 별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고통 받고 차별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감수성이 전혀 없어서 마치 무슨 괴물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당신처럼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사랑을 행하도록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는(루카 22,19), 당신을 기억하여 당신이 행하신 바를 계승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로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받고 차별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이어 받는 것을 예수님과 약속했음을 알아야 하며, 그래서 이 마음으로 약자를 보호하며 평화를 실현하는 데 존재이유를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국토 분단과 불평등 현실 탓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분단의 현실을 살펴보면,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휴전 중인 남북한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나서 두 세대가 넘게 흐르는 동안 전쟁의 상처는 겨우 아물었다지만 서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 넘습니다.
남쪽에서는 분단을 빌미로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벌인 일도 다반사여서 숱한 사람들이 개인과 가족이 누려야 할 행복이 짓밟혀 왔는가 하면, 그 바람에 옳고 그른 공동선의 기준조차 흐트러트려져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살아온 지 오래이며 심지어는 억울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패가망신을 시키고 일생을 망가트린 일도 많습니다. 남북한의 두 정상이 만나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며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자는 다짐을 전 민족 앞에 공개적으로 천명했어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우리 사회 안을 들여다보면 또 어떻습니까? 벼랑 끝까지 내몰린 사람처럼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한 해에 만 명이 넘고,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2천 명이 넘는 동안에, 그 가족들은 얼마나 큰 슬픔을 겪었을까요? 노사갈등으로 해고당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아픔도 부지기수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정신없이 살아온 한 해 동안에도 이렇게 우리 사회는 안팎으로 평화가 깨어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릇 모든 힘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개인들의 경우에 완력이든 지식이든 그러해야 하며, 국가 간의 경우에 경제적이든 군사력이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강자의 힘이 정의롭게 쓰이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할 때, 평화가 깨지고 약자들의 삶이 망가집니다. 그런 현실에서 역사상 교회가 약자 편에 서지 못하고 강자 편에 서고자 했을 때 하느님의 정의도 빛이 바랬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안에서 힘이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쓰여 지게 하는 원리가 민주주의입니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근본으로 하고, 국민들 개개인의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 공권력이 봉사하도록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공권력과 공직자들이 지닌 이러한 책임을 망각했을 때 국력이 약해지고 끝내 멸망하기도 했던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기도 하거니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재촉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평화의 표지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 간에 있어서나, 사회 내에 있어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이 됩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도 결실 있는 협력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전쟁은 물론 사회적 갈등에 있어서도 당사자 모두의 깊고 진실하며 용기 있는 반성, 참회로 깨끗해진 마음가짐으로 현재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각오를 통해서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과 분쟁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상황에서 정의와 진실은 화해에 필요한 실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우선 남북한은 이제 민족의 화해를 위한 협력을 진정성 있게 추구해 나감으로써 다음 세대에 가서는 한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산업현장에서도 평화를 회복하여 빈부격차와 노사갈등을 줄여 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안팎으로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는 기도를 통하여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켜줄 수 있으며, 성찬례는 평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참된 투신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평화가 사라진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고통 받고 차별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살아가신 예수님, 그분께서 심어주신 성찬례의 정신에 따라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 섬김으로써 공동합의에 이르는 교회를 이룩하는 일은 사회적 약자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기도의 과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계 평화의 날에 한민족의 평화와 사회 안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