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피해자 중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는 10만 명에 달한다. 그 희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며칠 전 합천에서 열렸다. 원폭으로 인한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치유하는 추모제다.
그 전날 한국과 일본 동시에 화상으로 세미나가 열려서 마쓰무라 다카오 명예교수(게이오기주쿠대학)가 ‘미국의 원폭투하 책임과 한일연대’라는 제목의 발제를 하였다. 한국탈핵에너지학회 부회장인 필자는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본고는 이 자리에서 토론한 요지다.
강제징용문제는 대한변협의 최봉태 변호사가 밝힌 대로, 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틀 안에서 일본 정부나 기업이 강제징용 노동자를 자발적으로 구제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번에 마쓰무라 교수는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마쓰무라 교수는 원폭투하를 둘러싸고 미국의 고의성과 기만성을 강조하였는데, 1) 미국이 원폭투하의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일본이 일찍 항복하지 않도록 조인서 내용에 ‘천황제 존속’의 조항을 일부러 삭제시켰다는 것, 그리고 2) 그 이전에 원폭투하를 독려한 정부 아닌 세력이 있었고 그것이 대금융자본이라는 점들을 예로 들었다. 이중 후자의 ‘대금융자본의 획책’은 아는 이는 알고 있지만, 필자는 학자가 논문에서 정식으로 언급한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원래 미국의 책임이 큰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군사기지를 원폭투하의 주타겟으로 했다 하더라도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하면 막대한 인명이 살상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원폭의 위력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대량 인명살상의 획책을 도모한 것은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인류사의 전대미문의 과잉무력행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대량학살의 의사결정에 민간의 금융자본이 투하를 독촉하는 역할을 했다는 마쓰무라 교수의 설명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돌이켜 보면, 후쿠시마 사고의 원죄가 어디에 있는지 뿌리를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 금융자본이 지금은 핵에너지에 빨대를 꼽았다. 가령 후쿠시마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은 사고 전까지 수십 년간 독점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독점적 사업자의 지위를 이용해 높은 전기요금, 낮은 운영비용으로 최대한 이윤을 만들어 내었다. 금융기관들이 대주주로서 주식보유 비중이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후쿠시마 사고 후에는 일본정부가 세금으로 만들어진 약 90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면서 대주주의 지위를 정부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손실을 보전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런 운영모델이 각국 정부의 지원 속에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1979년 스리마일 사고이후 원전 건설을 더 이상 하지 않은 미국 정부 역시 트럼프 정권때에는 텍사스 핵발전소 건설에 참여하는 금융기관들에 대해 정부가 보증을 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이런 보증은 결국 금융기관들이 원전에 투자했을 때 리스크 비용까지를 감안해 이윤을 보장해 주겠다는 이야기다. 이명박 정권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수출도 한국수출입은행을 통해 100억 달러 가까운 금융 조달을 정부가 담보를 제공해 주면서 민간 금융자본들에게 특별한 프리미엄을 주고 있다.
이렇듯 지구촌을 궁지에 몰아온 금융자본세력이 일찍이 원폭투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에 76년이 지난 지금에도 섬뜩한 위협을 느낀다. 왜 그랬을까? 향후 세계현대사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현재의 지구촌은 에너지전환이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위기가 올 때까지 자본세력은 이득을 먼저 챙겨왔다. 원전사고나 방사성폐기물 같은 손실은 민중이나 다음 세대에 떠넘기겠다는 전형적인 비윤리적 행태다. 문제는 미국이다. 핵무기확산 금지를 내세우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재료를 생산하는 핵에너지를 부추겨온 모순을 미국은 70년 넘게 저질러 오고 있다. 핵우산을 강조하면서 핵무기 재료인 플라토늄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를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 독려하고 있다니, 모순되고 미친 짓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민중이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적 권력이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전쟁당사자로서의 일본이지만 민간인의 원폭피해 보상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원론적으로 민간인 각자는 당연히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민간인의 권리를 미국은 강화조약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배상받을 천부적 권리가 있다는 본질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본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핵무력행사를 본질적으로 억제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잠재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주는 단서가 조선인피폭자와 후손에게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대로라면, 일본 최고재판소도 2007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전쟁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실체법적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무차별적인 핵무기 공격으로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2, 3세대들까지도 평생을 괴롭히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식민지배하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미국은 지금이라도 그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
우리는 배상 받기를 관철시켜야 한다. 이 배상이 이루어지면 인류사의 또 하나의 족적이 될 것이다. 조선인 피폭자와 2세 3세들이 미국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을 때 언젠가는 일본 민간인 개개인도 그 보상이 원리적으로 가능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각인되는 권력자측의 핵사용의 위험과 부담이 탈핵으로 가는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평화로 가는 첩경인 것이다. 합천의 피폭자 후손의 증언과 피해보상요구가 핵을 통제하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지구촌 차원에서 핵이 인류를 위협하는 일을 통제하는 기구와 조직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배출에 대해서도 일본정부가 잘못 판단하고 있고 미국정부와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이를 용인하는 행태를 보여 온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IAEA는 UN의 통제도 받지 않는 구조이고, 지구촌 인류의 대변인이 아니다. 원자력을 진흥하자는 세력이다. ‘중이 제 머리 못깍는 법’이다. IAEA와는 별개의 통제기능을 기둥으로 하는 세력의 조직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는 진화단계로 보면 아직 저차원의 존재다. 권력을 추구한 나머지 스스로를 자멸시키는 일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이게 진짜 위기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사람은 두 다리로 걷는다. 살아있는 조직은 씨줄과 날 줄이 있다. 집안은 부모가 있고, 나라에도 행정부와 의회가 있듯이 상호보완적 견제가 있어야 균형 잡힌 의사결정을 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지구촌은 지금 절름발이다. UN은 의회기능이 없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집행부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자력을 진흥하는 IAEA(국제원자력기구) 같은 기구는 UN의 통제조차 받지 않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 내에는 금융자본세력의 한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향해온 바는 자신의 이익이 지구촌의 안위보다 우선한다는 것.
아직 인류는 위기다. 기후위기를 극복한다손 치더라도 이대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후쿠시마라는 공포의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구촌 민중의 뜻이 작동하는 ‘의회’기능을 갖는 국제적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 의회의 리더에는 가령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달라이라마 같은 분이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IT소통기술의 혁명기에는 지구촌 민중의 뜻을 모으는 일이 어렵지 않다. 금융자본과 같은 소수의 세력만이 아닌 80억 지구촌 민의를 모으는 구조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상적 의사결정을 해갈 수 있는 길이다. 미국의 짐도 덜어가면서 기후위기도 돌파할 수 있다.
이원영 (수원대 교수, 한국탈핵에너지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