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사람을 낚을 것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가 5,1-11)
루가 5,1-에서 6,49까지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 이야기와 활동이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에 5,17-6,11은 예수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데 여러 방법을 이용했다.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논쟁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충분히 강조되었지만, 예수의 논쟁은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논쟁가 예수의 모습이 어서 회복되어야 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와 논쟁하는 상대측의 논리나 주장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 예수가 논쟁 상대를 반박하는 통쾌함을 우리가 복음서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와 논쟁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성서에서 온전하게 알 수는 없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상대의 생각을 우선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성서에도 부족하였다. 일반적으로 마라하면, 그리스도인에게 경청하는 자세가 크게 부족하다. 그 탓의 일부는 성서 저자에게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단락이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나타난 이야기와 관련 있는지 아니면 역사의 예수와 관계있던 이야기인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마르코는 복음 초반에 예수가 제자를 부른 일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루가는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예수의 가르침(루가 4,16-30), 행동(루가 4,31-44)에서 보여준 다음 제자 이야기를 꺼낸다. 가르침과 행동에서 사람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얻은 예수는 배에 오른다.
마르코복음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는(마르코 1,16) 루가에서 겐네사렛 호숫가로(루가 5,1) 바뀌었다. 예수와 시몬 단 둘이 배 위에 있고, 군중은 호숫가에 서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장면이다.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우리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가르치는 사람은 앉는다.(마태 5,1) 초대교회에서 배 이야기는 교회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
2절에서 예수는 배 두 척을 보았다. 제자와의 첫 만남은 예수의 눈길에서(마르코 1,16. 19) 시작되었다. 예수의 눈빛은 사람을 자비로이 부르신다. 모든 인연은 우리의 애정어린 눈빛에서 시작된다. 불교에서 따스한 눈길은 벌써 보시 아닌가. 독재자의 독기어린 눈길은 기억하기도 싫다.
마르코에서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는 루가에서 그물을 씻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5절에서 epistates스승이란 단어는 유다 교육제도에서 쓰이지 않았다. 시몬 혼자서 배를 저을 수는 없겠다. 시몬은 배를 소유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시몬과 같이 일하는 다른 어부들이 있음이 전제되었다.
어부가 아닌 예수의 조언에 어부인 베드로는 주저하듯 응답한다. 낮보다 밤에 고기를 잡기 쉬웠다. 베드로와 인부들은 밤에 고기잡이 하느라 이미 지친 상태였다. 낮에 뜨거운 태양 아래 호수에서 또 그물질 이라니. 그물로 고기를 잡아야 하지만 그물이 망가지면 큰 손해다.
8절에서 베드로는 예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민수기 22,31; 에제키엘 1,28; 마르코 3,11) 죄인이 하느님을 뵈올 때 두려움을 가진다.(이사야 6,5)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당부는 인간적인 애정을 훨씬 넘어선 하느님다운 모습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시몬의 동업자로 보도된 것은 루가에서 여기가 처음이다.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말은 사람을 모을 것이란 뜻이다.(마르코 1,17; 예레미아 16,16)
11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심각하다. 예수는 베드로 한 사람을 불렀는데, 예수를 따른 사람은 여럿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말은 루가가 강조하고 있다.(루가 9,62; 12,33; 14,26)
오늘 예수를 따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엇을 버리고 있을까. 진짜로 버린 것이 있기는 있을까. 예수를 따르려 자신을 비울까. 무엇인가 채우려고 예수를 따를까. 나는 무엇을 버렸나.
오늘 단락에서 요점은 무엇일까. 베드로의 수위권? 제자들의 복음 선포 사명? 우리 인격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은혜에 따른 제자됨? 보는 사람마다 강조점이 다를 수 있겠다.
인간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간으로 창조된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 하느님께 부름 받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어느 방식으로 부름 받고 어떤 임무를 받든지, 오늘 단락이 말하는 진리가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오늘 그리스도교는 왜 이 모양일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고 맹세한 사람들의 삶은 왜 저 모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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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하지 않고 익숙한 곳에서 떠남,
조직에서 떠남,
친분, 인맥에서 떠남,
처음엔 이런 상태가 불안하고 불명예스럽고, 배신감과 억울함으로 분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흐름과 맥락이 이해되고 새로운 만남과 글을 접하면 전체가 보이고 문제들이 의미를 제시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척이라는 수동적 상태에서 떠남이라는 능동적 상태로 볼 수 있다.
공동체에서 왕따당하거나 거부당하는 것을 잠시 놓아두고 기다려보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파도는 잔잔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