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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에서 벗어나야 할 때
  • 이기우
  • 등록 2023-12-22 15: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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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금요일(2023.12.22.) : 1사무 1,24-28; 루카 1,46-56


오늘은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는 이사야 예언자의 대림 메시지에 따라서 4대 가톨릭 교리와 5대 가톨릭 사회교리 원리를 살펴보는 마지막 차례입니다. 바로 연대성 원리입니다. 어제 보조성 원리에 대한 묵상을 전해 드리면서 묵상한 교황 바오로 6세의 기념비적인 회칙 ‘민족들의 발전’ 을 좀더 자세히 간추려 소개하는 기회입니다. 아울러 독서와 복음 내용에 걸맞는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는 프란츠 파농의 삶과 메시지도 전해 드릴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사무엘을 낳아 기른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나는 기도하며 사무엘을 잉태하였고 젖을 뗄 때까지 기른 다음에는 사제 엘리에게 맡기며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기도로 태어나고 기도로 성장한 사무엘은 마지막 판관이요 첫 번째 예언자로서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사울을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으로 세워 기름을 부어주기까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힘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 찬송입니다. 이미 태중에 구세주를 잉태하고 있었으니, 성모 찬송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찬송 어린 응답을 듣고 마리아가 노래한 이 기도 안에서는 마리아의 신앙은 물론 그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간직해 온 신앙적 전승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친히 세우실 세상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버리시고,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통치자들 대신에 비천한 이들이 들어 높여지며, 빈손으로 내쳐진 부자들 대신에 굶주린 이들이 배불려지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가히 현실의 역전이라 할 만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이미 마리아의 신앙 속에는 하느님께서 몸소 이루시고 실현하실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새로운 세상도 기도로 이미 그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가 바치는 기도 속에는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실현하시기를 염원하는 바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겸손한 이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교만한 자들이 흩어지고, 비천하다고 억눌렸던 이들이 들여 높여질 수 있도록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지며, 굶주린 이들이 배불릴 수 있도록 탐욕스런 부자들이 빈손으로 내쳐지는 세상입니다. 대림시기에 바쳐지는 고요한 기도 속에는 우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찬송이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전이 숨어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과 기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역전은 당연히 종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다분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샤를르 드 푸꼬 신부가 활약했던 그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했던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 백인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며 마리아 찬송에 들어있는 역전을 꿈꾸었습니다. 샤를르보다 한 세기 늦게 같은 알제리에서 파농이 발견한 현실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로 억압받는 민중이 상호간에 저지르는 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폭력은 프랑스인들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난한 이들의 정신질환을 수년간 관찰하고나서 1952년에 책을 펴냈습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흑인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는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민지 민중이 저지르는 상호 폭력의 원인은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수직폭력이라고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던 알베르 까뮈 같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경의를 표했던 흑인 지식인이었습니다. 단지 흑백 피부색이나 종교적 편견에 의해 저질러지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종은 영원히 중단되기를 바라며 기도했던 현대의 예언자였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나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흑인이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아야 했던 그는 자기가 배운 완벽한 프랑스어로 식민지배의 역사와 식민통치의 구조가 갖는 폭력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알제리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의사로서 사용한 치료법은 그저 정신질환자들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폭력에 의한 광기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삶의 준거를 다시 찾게 함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책은, 프랑스 리옹에서 정신분석학과 의학, 철학과 문학과 인류학을 폭넓게 공부한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으나 거절당한 논문이었습니다. 그 책의 서문을 쟝 폴 사르트르가 이렇게 썼습니다. “유럽인은 동양을 ‘괴물’과 ‘종’으로 만들면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며, 후자는 그것을 가져다 썼다….”


성모 찬송을 이 시대에 균형있게 이해하자면, 프란츠 파농의 외침과 노력 위에 샤를르 드 푸꼬의 영성과 실천이 자리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외침과 노력, 영성과 실천을 시대의 징표로 식별하여 반포된 회칙이 바로 바오로 6세(2018년 시성)가 공의회의 가르침을 담아 1967년에 반포한 ‘민족들의 발전’입니다.


이 회칙은 최초의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와 여러 모로 슷합니다. 레오 13세 이후 역대 후임 교황들이 후속 회칙을 반포하면서 ‘새로운 사태’ 회칙 반포 40주년인 1931년에 비오 11세가 회칙 ‘사십주년’을 반포했고, 70주년이 되던 1961년에 요한 23세가 회칙 ‘어머니요 스승’을 반포했으며, 90주년이 되던 1981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하는 등 사회회칙 반포의 기점으로 삼았듯이, 바오로 6세 이후 요한 바오로 2세도 ’민족들의 발전‘ 회칙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1987년에 ’사회적 관심‘ 회칙을 펴냈습니다. 그만큼 이 회칙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획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민족들의 발전’ 회칙은 연대성 원리에 특히 집중적으로 특화된 회칙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이 밝힌 이 회칙의 반포 배경을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분명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만큼 정의를 벗어났다. 온 민족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빼앗기고, 뜻대로 무슨 일을 시작할 수도 없으며, 책임 있는 무슨 직업을 택할 수도 없다”(30항).


그리하여 바오로 6세는 마리아의 성모 찬송에 담긴 파스카 과업의 메시지인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해방을 ‘발전’이라는 현대적 영성으로 승화시켰으며, 이는 종래의 구원과 전교의 개념에다가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연대성 원리를 파격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발전을 위한 연대’라는 메시지와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라는 메시지가 이 회칙의 주안점이며, 발전과 연대의 주인공인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이 회칙이 선포하려는 복음인 동시에 성모 찬송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현대 가톨릭교회의 메아리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모 마리아께서 기도로 찬송하신 새로운 세상, 샤를르 드 푸꼬가 삶과 목숨으로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 프란츠 파농이 책과 활동으로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 그리고 성인 교황 바오로 6세가 온 세상 가톨릭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이들에게 호소했던 ‘더 나은 세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매년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깨어 기다리며 맞이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성탄 전례는 강생의 신비를 구현하라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적 각성이나 사회적 실천 없이 전례로만 구세주 성탄을 맞이해 온 관행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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