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4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4부는 각각 ‘거짓말하는 신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교회가 하는 거짓말’ 입니다.
교회가 하는 거짓말
성서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걸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은 엄연히 존재하고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성서가 제공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참과 거짓이 뚜렷이 구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게 관건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예언자들은 대부분 야훼의 보냄을 받은 참 예언자들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요엘, 미가, 호세아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라고 판명된 예언자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대립했던 하나니야와 미가야와 맞섰던 시드기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참 예언자들이 실제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그렇게 인정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 대접을 못 받은 사람도 있었고 원수 취급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죽임당한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가나 아모스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본다면 놀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박해했던 자들이 참 예언자로 존경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둘을 구별하는 왕도(王道)나 비방(秘方)은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 할 때마다 인용된 신명기와 예레미야 구절들과 그 외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판단이 옳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영혼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받아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메가처치’가 온갖 문제의 온상입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말하면 메가처치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쾌하지 만들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뒤집으면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신랄하게 말하면 교인들에게 아첨하는 말만 합니다.
꾸중이나 질책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도 꾸중 듣길 싫어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들어야 하는 꾸중이라면, 네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질책이고 내 영혼의 병든 구석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꾸중이라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 꾸중과 질책은 들을 땐 고통스럽지만 결국에는 영혼이 치유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여기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이런 꾸중과 질책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고통스런 질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꾸중 듣길 싫어하긴 하지만 지루해서 졸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대교회의 특징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사회악’은 말하지만 ‘개인의 죄’는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 말고 누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는 말입니까? 사회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편 메가처치나 그게 되고 싶어 하는 교회는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강조하는 교회는 전통적인 보수교회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는 죄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질책하는 데 그칩니다. 교회는 사회악도 얘기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죄와 사회 전체가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합니다. 듣기 싫어한다고 침묵해서는 안 되고 개인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듯 덮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진보교회와 메가처치, 보수교회 모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 것과 실제로 죄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은 다릅니다. 죄로 물든 영혼의 심각성과 그것이 개인의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타락시키는 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끈질기게 파헤치지 않고 그저 건성으로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는 교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죄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진지하게 얘기하지는 않는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세상도 널 대할 것이다
참된 우정은 친구를 잃어버릴까봐 친구의 잘못을 모른 체하거나 참는 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애인을 잃어버릴까봐 그의 병든 영혼에 진통제만 놓는 게 아닙니다. 교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려는 교회라면 거짓말로 교인과 세상을 마취하려 하지 말고 잘못된 길로 가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꾸중과 질책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엔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하겠제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뒤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인생의 비밀은 단 한 가지,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것이다……. 네가 세상을 향해 웃으면 세상은 더욱 활짝 웃을 것이요 네가 찡그리면 세상은 더욱 찌푸릴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진실하게 대하면 세상도 교회를 진실하게 대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거짓으로 대하면 세상도 그럴 겁니다. 세상이 웃는다고 따라서 웃는 데 그치지 말고 세상보다 먼저 웃으면 어떨까요? 세상이 찡그린다고 따라서 찡그리지 말고 먼저 웃어줌으로써 세상에 웃음을 찾아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에서 조피아와 엘즈비에타의 종교가 바뀌었습니다. 가톨릭 교인이었던 조피아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고 유대인 소녀였던 엘즈비에타는(그리스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경건하게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둘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지 여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에 얼마나 진지한가,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가가 중요하겠지요.
조피아는 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했지요. 어렸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모르지만 자라면서 분명하게 그 차이를 깨닫는다고도 했습니다.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사람은 그 신을 거부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신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외로움(Loneliness)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 달게 받아야 할 벌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조피아가 얘기한 유대인 아이를 미끼로 저항 운동가를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진실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영화는 이에 대해 묘하게 침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지만 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엘즈비에타는 그 얘기로 인해 사십 년 동안 꿔온 악몽에서 해방됐습니다. 조피아도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사십 년 동안 괴로워했는데 마침내 만나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진실한 말 한마디가 두 사람 모두를 악몽에서 해방시켜 준 셈입니다.
말은 사랑을 담아 건넬 때 진실해지고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진실은 사실의 확인 이상입니다. 진실한 말에는 애정이 담겨 있기에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두 여인은 만나기 전엔 각자 자기 안에 똬리 틀고 앉아 괴롭히는 악마와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두 사람이 애정이 담긴 진실한 말을 나눴을 때 증오와 죄책감이란 악마에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을 없애려면 참된 말로써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한 마디 말에 진실을 담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 말로 깨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사랑이 담긴 한 마디의 말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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