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격해질 때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말은 “법대로 합시다”이다. 현대 국가는 법치주의를 이념의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언뜻 법대로 하자는 건 좋은 해결방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패악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질러지고 있다. 법이 힘없고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방어막이 되기보다는 권력가와 재벌들을 보호해주는 안전망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현대의 법은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냉정하게 재단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에 대해 묻거나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거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일 따위에 호응하지 않는다. 일어난 사건을 판단하고 결정할 뿐이지, 사건의 의미나 인간성 고려와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근대에 법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나름의 법을 정해놓고 살았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에게는 바다에서의 법이 있었고, 산에서 나는 산물로 생명을 유지했던 산골사람들에겐 산의 법이 있었다. 섬에는 그들 환경에서 나온 섬의 법이 있었고,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막에는 사막의 법이란 것이 있었다.
이들 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다움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품위였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냉정한 근대 법은 이러한 품위와 배려를 저급한 동정심 정도로 여겨 무시하고 짓밟아 버렸다.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저항하는 이들이나 어긋나는 이들에게 불법자라는 굴레를 씌워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놀라운 것은 해안의 아름다운 바위들을 부수고, 생명력 넘치는 계곡을 뭉개는 일들이 모두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생태계를 보존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보호하자는 외침을 모두 불법이라 규정하는 것이 더욱 놀랍다. 물속에서 죽어가는 이를 살려내려는 노력과 전쟁과 폭정을 피해 품속으로 숨어든 난민을 보호해주는 일이 불법이라는 사실 또한 그렇다.
영화 ≪테라페르마, Terraferma≫(2011)는 아프리카 난민이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걸 건져주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압력을 받는 이탈리아의 남쪽 끝 이름 없는 섬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한 가족의 번뇌를 다루고 있다. 영화에는 바다에 난민이 빠져도 절대로 구조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법이라는 엄포에 저항하는 섬 사람들의 모습이 이탈리아 영화 특유의 네오리얼리즘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아무리 가난한 살림이지만 바다에 빠진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 것이 바다의 법이라고 주장하는 노인들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갈등도 영화의 장면 사이사이마다 녹아있다.
불현듯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신세대가 서서히 주류로 떠오르는 현 한국 사회의 모습이 영화의 섬 젊은이들이 법을 운운하는 모습과 오버랩 되어 온몸 가득 소름이 돋았던 것은 좀 과한 반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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