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출신 ‘소날리 보세(Shonali Bose)’ 감독의 최근 영화 ≪내 생애 첫 번째 마가리타, Margarita With A Straw≫(2014)는 인도에서 상영되지 못한다. 덕분(?)에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전작 영화인 ≪아무, Amu≫(2005)와 ≪치타공 Chittagong≫(2012) 역시 인도에서 상영되지 못한 채, 해외 영화제를 떠돌고 있다. 인도정부가 보기에 그녀의 작품에는 이중삼중의 불손함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우리의 남북관계 만큼이나 험악하다. 우리의 경우 이데올로기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문제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오랫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는 하나의 국가였다. 인도를 식민통치했던 영국이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인도의 힘을 분산시켰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이 물러가자 본격적인 종교분쟁이 일어났고, 급기야 여러 차례의 상호 전쟁이 일어나며 분열이 진행되었다. 현재 인도는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불교국인 스리랑카로 사분되어 있다.
‘소날리 보세’ 감독이 주로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와의 화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인도정부가 발끈했던 것이다. 최근 작품인 ≪내 생애 첫 번째 마가리타≫에서는 여성의 문제, 장애인의 문제, 성소수자의 문제 그리고 파키스탄의 문제까지 사중의 문제를 다중적이고 심층적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문제에 특히 보수적인 인도정부가 영화 상영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은 일차적으로 대립적 방식으로 언어의 개념을 익혀나간다.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힌두교와 이슬람 등등의 대립적 언어로 자신들이 정립하고자 하는 개념을 확보해나간다. 이렇듯 ‘저것 아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방법은 이미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언어를 비판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상대적 개념의 여성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란 개념은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기에 감사합니다”라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나가지 말아야함을 의미한다. 이념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적대세력을 상정해놓고, 언론을 통해 그들의 악함을 꾸준히 노출시켜 적대감을 증대시키면서 우리는 그들과 전적으로 반대라는 방식으로 확보된 정통성은 자기모순에 빠져 결국 붕괴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감독은 이성애냐 동성애냐 또는 양성애냐 하는 성적 유형에 매달리지 않는다. 서로를 속박하거나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의존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떤 유형으로 살아가더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라면 나와 동행하는 사람이 이성(異性)인지 동성(同性)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와 나의 관계가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과 결국 나는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이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대립성을 넘어 서서 드디어 자기 주체성을 발견한 주인공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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