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 <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 >와 < 두 교황 >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편집자주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대표이자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의 지도자다.
이 문장이 말하듯, 교황의 권위는 실로 크다. 과거에는 황제가 되려면 교황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정치적 권력을 가진 시대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교황은 교회 안에서 특정 상황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나 자신의 발언이 반드시 올바르다는 보증인 ‘교황무류설’(papal infaillability)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절대적 권위만큼이나 교황청 재정비리, 성직자 성범죄, 전세계의 기근과 전쟁에 따른 난민 증가, 지역교회의 수많은 문제 등 사회 문제와 교회내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무능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그러한 무능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지적하는 무능만이 아니었다. 학대를 입은 끔찍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 앞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한 채 교리와 원칙만을 외친 교회의 무관심, 경직된 태도였다. 이는 동시에 이러한 무능을 그저 관망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 이후 가톨릭신자들과 일반 대중이 교황의 권위와 교황을 바라보는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신학적으로 개혁적인 성향, 해방신학이 태동한 남미 출신이라는 모습도 있지만, 무엇보다 ‘검소’, ‘소탈’, ‘어려운 사람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교황’과 같은 모습이 주목을 받는다. 이것은 교회를 이끄는 교황의 관점이 아니라, 그저 교황으로 선출된 ‘한 사람’의 인품에 관한 평가다.
가장 대표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의 전통적 거주시설인 교황궁이 아닌 교황청을 찾는 손님들이 사용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에 살겠다고 결정한 일이 그렇다. 교황 선출 직후 처음으로 베드로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교황은 교황직의 상징인 붉은 벨벳 망토, 페라가모의 붉은 구두를 신지 않고 자신이 신고 있던 검정색 구두를 그대로 신었다. 이외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기 서류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모습은 흔히 포착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황의 인간적 모습에 열광한다. 사실 자기 서류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일만큼 평범한 일이 없고, 내게 맞는 구두를 신는 일이 별다른 일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전임 교황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고, 여태껏 기대했던 교황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나와 다른 세상에 살며, 내 위에 군림하고 있다 생각했던 이가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쁨과 열광을 자아내는 이유는 뭘까? 바로 교황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망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여러 문제적 사안에 관한 입장에 따른 지지와 반대에서 오는 희망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 이는 비단 교황의 지지자만이 보내는 열광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교황의 여러 행보들, 특히 난민을 환대해야한다는 교황의 입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난민을 돌보고 환대하는 행위까지 폄하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대립이 심한 동성애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교황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11월과 12월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한 <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의 감독인 빔 벤더스의 <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 >와 베네딕토 16세 사임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들이 표상하는 가톨릭교회의 두 입장의 대립과 이해를 다룬 '두 교황'이 개봉했다.
이 두 영화는 다큐멘터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는 점에서 장르적으로 매우 다른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은 모두 교황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문제들에 관한 고뇌를 조명한다. 즉, 지도자로서의 교황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교황의 고민들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그의 삶 자체가 강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오래 알아왔던 마리아 에우페미아 고이코체아(Maria Eufemia Goycoechea) 수녀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두고 한 말이다. 수녀의 말은 교황이, 아니 ‘베르골료 신부’가 자신의 삶으로서 세상에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뜻일테다.
<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 >는 성 프란치스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베르골료 추기경,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라는 인물의 여정을 보여준다.
교황의 6년 임기 동안 벌어진 빈곤, 생태, 동성애, 성범죄, 교회일치 문제 등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도자로서의 입장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절 때부터 보여 온 인간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관심이 이러한 입장의 바탕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장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하느님께 사랑 받는데 있어, 더 넓게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땅을 어쩔 수 없이 떠나온 난민들과 학대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남녀노소, 지위고하, 소속을 막론하고 인권을 누려야 한다. 개인의 성적 지향이 어떻든지 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이기 때문에 한 형제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무신론자에게도 하느님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신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하느님에게 덜 사랑 받는 것일까? 아니다”
“신부나 수녀가 하느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을까?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 사랑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이웃을, 그분께서 하신대로,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 일견 당연하게 보이는 이 말은 더 이상 교회 지도자의 지켜지지 않을 무용하고, 뻔한 훈계가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인물의 삶의 궤적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가치로 다가온다.
람페두사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는데…
영화 < 두 교황 >의 첫 장면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 듯, 많은 난민이 머물고 있는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에 가기 위한 비행기 티켓을 직접 예약하는 장면이다.
< 두 교황 >은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택한 교황의 평범성으로 시작해, 검소함으로 맺어진다. 비행기 티켓을 직접 예약하는 교황과 권위의 상징인 망토와 구두, 목걸이를 거부한 교황. 표면적으로는 성범죄, 동성애, 이혼한 신자들의 성체성사 문제 등 가톨릭교회 내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교회 내의 입장 차이를 다루고 있지만, 그 내막에는 두 교황의 인간적 고뇌가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료 추기경이 서로에게 베푼 고해성사다. 통상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내밀한 고해성사를 통해, 닫힌 전통과 변화라는 이분법의 거울로 비춰지던 두 성직자의 모습은 어느새 전통이란 고인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내는 동력이라는 메시지로 승화된다.
처음에는 변화란 곧 타협이라 했던 베네딕토 16세는 변화가 타협이 아닌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베르골료 추기경과 대립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변화’와 ‘타협’이라는 단어를 통해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료 추기경은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도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타협’처럼 느껴졌으나 돌아보니 자신을 뒤흔든 ‘변화’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들이 형제로서 함께 거닐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상의 행위를 통해 형제애를 되찾는 순간, 어느새 이들은 더 이상 어떤 ‘고위성직자’라는 이름이 아닌 그저 ‘형제’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사이가 되면서 ‘일치를 이루게’ 된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식사’가 주는 메시지가 크다. 베르골료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로부터 별장에서 대접받았던(하지만 같이 먹지 않고 다른 장소에서 따로 먹게 된) 독일식 식사와 후에 두 인물이 함께 먹게 되는 노점상의 피자와 탄산음료의 대비는 강렬하다.
처음에는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기를 거부했던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골료와 함께 둘러앉아 피자를 먹고, 베르골료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의 피자를 뺏어먹기까지 한다. 이렇게 식탁은 무례하지 않은 침범의 공간, 즉 공유와 나눔의 공간으로 변화하여 교황에게서 바라는 인간적인 모습을 끌어낸다.
우리가 바라는 교황은 누구인가
역대 교황들은 모두 예수의 말씀에 따라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보편적인 말들을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특별하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말들을 실천함으로서, 그 말들이 더 이상 힘을 잃은 ‘뻔한’ 말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결국 누구일까?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땅위에 서서, 우리 옆에 서서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그것이 <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 >과 < 두 교황 >이 바라는 교황이 아니었을까.
-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