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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두 달도 안 남았다, ‘응보의 날’을 볼 수 있을까 (김웅배) 은혜로운 해 ‘희년’, 그리고 응보의 날 2022-01-18
김웅배 edit@catholicpress.kr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대로 자신이 자라온 동네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신다. 예수님에 대해 칭송이 자자한 소문을 듣고 있던 모든 나자렛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어느 부분의 성경을 읽을지 몹시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은 건네받은 이사야서를 펼치고 이 구절을 찾아 선포하신다.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시고서는 다음과 같이 확고한 ‘계시적’ 결론을 내리신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든 청중들의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나자렛 주민들은 예수님의 선포에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자신들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주시한다. 이번에 말씀은 그들이 그냥 항상, 매번 들어왔던 이사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서의 원문은 이렇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이사야 61,1)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된 유다인들의 예언서 이사야의 이 원문은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사야 서는 항상 듣던 말씀이었다. 인용한 문장 중에서 단지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한다는 말씀이 빠졌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말씀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적대적 의미의 ‘응보(복수)’는 생략하고 성경 말씀이 너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긍정적 현재완료형으로 선포하신다. 그리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계시적 의미의 ‘메시아’로서 자리매김을 하셨다.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였다.


그들은 그래서 주시했다. 그러나 이후 나자렛 주민들은 이어진 예수님의 다른 말씀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이사야서의 이 내용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선포한다면 민초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악덕 부자들에게 아주 불편한 소식을 전하고 극단의 이기적 자유를 누리는 이들에게 독방의 맛을 보게 하며 스스로 눈떴다며 지혜롭다는 자들을 다시 암흑 속으로 돌려보내고 초법적 불법적 행태를 일삼는 자들을 엮어서 철창 감옥으로 처넣으며 실제로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어 주님의 진짜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을 거스르는 자들은 주님 응보의 날을 맞이하고 하느님은 피해자를 위로하시리라.”


구약의 하느님은 응보를 천명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사야는 ‘복수’를 언급했지만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특히 강조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고는 하느님의 나라’ 로 일컫는 곳,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셨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두 달도 안 남았다. 예수께서 핍박받는 약자를 돌보듯이, 기본적 사회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 온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 법비들의 횡포 속에서 새가슴을 감싸 쥐고 사는 민초들에게는 ‘은혜로운 해’가 되고, 사익에 더욱 충실하고 50억도 ‘푼돈’인 자들에게는 이사야의 말처럼 ‘응보의 날’이 되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민초들의 진정한 바램이다. 


이 바램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선행 조건이 되면 안 될까? 아무려나 인간의 입장에서 본 선행 조건인, ‘응보의 날’이 그렇게 간단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질 리는 없겠지만!


그러나 민초들의 고함여부에 따라 분명히 ‘사회정의’에 입각한 ‘보복’이 아닌 ‘응보의 날’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은 아직 있다. 공연(公然)히 사회 정의에 관한 가톨릭 교리서에 내용을 옮겨본다.


- 사회는 단체와 개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실현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보장한다.

-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을 ‘또 다른 나’로 여긴다.

- 사람들 사이의 평등에는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그 존엄성에서 유래하는 권리의 평등도 따른다.

-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필요를 느끼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속하는 것이다. 그 차이들은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은 지나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도록 요구한다.

- 인간 존엄성은 부당한 불평등의 퇴치를 촉구한다.

- 연대성은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덕목이다. 연대성은 물질적 재화보다는 영적 재화의 나눔에 더욱 힘쓴다.

(1943조-1948조 간추림)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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