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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아끼고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이신부의 세·빛] 예수의 세례, 우리의 세례 이기우 2025-01-10 15: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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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2025.1.12.) : 이사 42,1-4.6-7; 마르 1,7-11 


물의 세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로써 성탄 시기를 마치고 내일부터는 연중 시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온 유다 지방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몰려들 즈음,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세례자 요한은 극구 만류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그리고 마치 죄를 씻으러 온 여느 죄인처럼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믿는 이들 모두가 본받게 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으로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씻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도 물로 세례를 받을 때,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물의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합니다. 새로 태어난 우리가 받는 새 이름이 바로 우리의 세례명입니다.  


선택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내린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움직이던 세력들 즉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젤로데파 그리고 에세네파 가운데 그 어느 세력에게도 가담하지 않으셨음을 뜻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사회가 파국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던 유일한 인물인 요한의 메시지에 동의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다윗 임금 시절에 활약한 대사제 사독의 후예로서 대대로 사제직을 세습하며 로마 제국의 총독과는 일정한 협력을 조건으로 종교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올려지는 번제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유일한 통로라고 주장하던 보수세력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는 그리스계 왕조가 지배하던 시절에 외세의 지배를 배격하며 유다교의 순수성을 보전하고자 일어난 개혁세력인데, 모세오경 안에 들어있는 율법을 중시하고 이를 잘 지키게 하기 위한 구두주석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본시 십계명으로 시작된 율법이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해야 하는 규정이 365 가지, 하지 말아야 하는 규정이 248 가지 등 모두 613 가지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기시키며 오염되고 훼손된 율법을 복원하시자 사사건건 그분께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두가이파가 예수님을 제거할 때 부역(附逆)하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혁명을 꿈꾸던 젤로데파가 있습니다. ‘젤로데’란 열혈당을 뜻합니다. 갈릴래아 출신들로 구성되었던 이들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고자 열성적으로 노력했던 무리입니다. 예수님도 갈릴래아 지방 출신이지만, 그 제자들 역시 주로 갈릴래아 출신이었으므로 젤로데파와 일정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합류한 안드레아(요한 1,40), 아예 열혈당원 출신으로 소개되는 시몬(루카 6,15),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등이 그러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성경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에세네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파국이 임박한 이스라엘 사회를 떠나 살던 독신사제들로서 사두가이파 세습 사제들의 부패상에 반발하여 유다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에는 세례자 요한도 이들 에세네 파 출신으로 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청빈한 생활양식으로 살면서 죄를 씻는 예식을 중시한 점이 공통적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에세네파 사제들이 매일 물로 죄를 씻는 정결례를 행한 데 그치지 않고, 단 한 번의 정결례로 모든 죄를 씻을 수 있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례를 받은 우리의 선택도 예수님의 선택을 따라야 합니다. 사두가이처럼 종교를 세속적 기득권의 받패로 삼지 말아야 하며, 바리사이처럼 율법을 무기로 삼아 애덕 실천을 미루지 말아야 하고, 젤로데처럼 폭력으로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하며, 에세네처럼 세상을 피해 살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세례의 징표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 무리에 합류하거나 요한처럼 물의 세례를 주는 일을 하시지는 않으셨고,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즉, 파국이 임박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특히 그분이 주로 활동하신 지역은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의 수탈과 예루살렘 부재지주들의 착취가 심했던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 주민들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던 이들이 몰려왔고, 기적적으로 병을 치유받고 마귀도 쫓아내어 주셨다는 소문이 점점 퍼지자 이스라엘 각 지방은 물론 국경 너머 티로와 시돈 같은 해안지방과 요르단강 건너 데카폴리스 같은 내륙지방에서도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아픈 이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 들린 이들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진리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들려 주셨고, 그분의 뜻에 살고자 하는 이들은 제자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 결과 곳곳에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은 열두 명이었고(마태 10,1-4) 이들에 의해 불어난 성소자 예순 명을 합해 일흔두 명으로 제자 공동체를 이루었으며(루카 10,1-12), 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할 때 도와준 토박이 지지자들과 여인들을 포함하여 초대교회의 주축을 이룬 이들은 모두 백스무 명 가량되었습니다(사도 1,15).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드님으로서 그분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실상이 이러하였습니다.


불의 세례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음모가 노골화되던 무렵에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로 양성하시는 데 진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당신이 걸어가실 길을 따라 걷도록 당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루카 12,50)고 밝히신 ‘불의 세례’였습니다. 이 불의 세례는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루카 12,49)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의 세례이기도 했습니다(요한 20,22). 십자가의 세례이기도 했던 이 불의 세례는 부활의 세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 수난을 예고하실 때 항상 부활도 예고하셨고, 실제로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물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 사람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풀면서 불의 세례를 의미하는 뜻으로 축성된 기름 즉 성유를 발라줍니다. 이를 도유(塗油) 예식이라 하는데, 세례를 받는 이들로 하여금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게 하여 부활한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끄심을 전례로 표현하는 취지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메시아의 대속적 삶을 따르자는 취지로 행하는 것입니다. 대속적 삶이란 우리가 세상의 좨에 물들지 않음은 물론 이에 맞서는 한편으로, 다른 이들의 죄로 말미암아 빚어진 세상의 죄를 없애고자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과 불의 세례를 받고 살아가는 이 ‘대속적 삶’은 우리의 인생관에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도전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하고 그것도 그 오랜 생애 동안에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를 원합니다. 흔히 이를 장수의 복이라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자면, 이런 자연사의 경우도 결국 나이가 들어서 겪어야 하는 죽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죽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삶으로 인한 인생만이 틀림없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적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십자가의 삶과 죽음을 선택하셨고, 우리에게도 이 길을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내다본 내용은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예언이 아니라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대속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예언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 그러니까 이 예언에 따르면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적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신자는 공정하게 살아가며,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을 만큼 생명을 아끼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에서 비롯된 은총이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파국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가서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가 우리가 받은 세례의 기원입니다. 그분은 물의 세례를 받으신 데에 그치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시고자 자원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으며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세상의 죄에 물들었던 처지에서 죄를 깨끗이 용서받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택도 예수님의 선택을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음을 선언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그 나라의 가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성령께서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기운을 주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의 은총과 의미를 새롭게 상기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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