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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활동가 이금연 인터뷰 :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9-09 10:47:20
  • 수정 2015-11-05 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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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편집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네팔의 아이들과 학교이야기’라는 책을 쓰셨는데 이 책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 (이금연 선생) 제가 한국에서 만났던 이주노동자들과의 인연으로 2000년부터 네팔을 방문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면서 활동을 병행했던 사람들이 귀국했을 때 귀국 정착지원을 위해서 네팔에 갔죠.


2000년 초기부터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을 지원했었고 2005년에는 제가 안식년을 가지면서 네팔에서 몇 개월 더 체류했는데 그 때 노동하는 어린이들을 만났어요.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다가 돌아간 활동가들이 노동하는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학교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장학금 지원을 2006년부터 하게 됐습니다.

2005년에는 지진과 같이 큰 재앙은 아니었지만 지구 기후 변화로 인해 갑작스런 한파가 왔는데, 그때 긴급구호기금을 모아 2005년 12월에 다딩(Dhading) 지역 마하데브베시(Mahadevebesi)라는 곳에 가서 300가정의 노동자 가족들에게 의류와 담요를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네팔을 계속 다니고 있어요. 처음부터 학교와 어린이들에게 집중했죠. 그동안 지원해주시고 관심 가지셨던 사람들에게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제 경험을 나누면 젊은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책을 썼습니다.



-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주셨는데 이주노동자들은 네팔에서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네팔로 돌아간 분들을 말하시는 거죠? 그분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다시 적응을 잘하시던가요?


▶제 15년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잘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네팔 친구들은 귀국 초기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죠. (그 사회에 잘 정착해서 성공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명칭이 바뀌었지만 네코데코(NeKo-DeCo, Nepal-Korea Development Cooperation)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이 단체도 한국에서 귀국한 네팔인들이 만든 건데 한 때 회원이 550명까지 늘었죠. 지역 개발을 위한 단체였는데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을 떠날 계기가 마련되자 다 떠나서 회원이 단 5명밖에 남지 않는 경우를 봤어요. 이런 경우를 봤을 때 반드시 그 사회에 적응을 잘한다고 볼 수 없어요.


-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 첫째로 그 나라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아요. 자신의 나이나 경력에 걸맞게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는데 일자리가 많지 않거든요. 둘째로 해외이주노동을 한다는 것은 나름의 경제적인 수입이 그 나라에 비해서 높다는 좋은 점이 있어서 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귀국 후 해외에서 했던 일에 견줄만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데다 오랜 해외 체류 후에 모국의 문화 적응을 못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해외로 나가는 가죠. 제가 보기엔 적합한 일과 사회문화적인 적응이 중요한데 그들을 다시 해외로 나가게 하는 것은 일이 제일 주된 요인이라고 봐야겠죠.


- 네팔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벌면 한국에서는 큰돈이 아니지만 본국에선 큰돈이니까 귀국하면 떵떵거리면서 산다는 오해도 없지 않아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 2~3년 일하고 본국에 가면 집을 몇 채 산다든가 하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은 보통 큰 집에 여유롭게 누리고 산다는 것을 말하는 건데… 그건 풍문이죠. 책에 등장하는 서머르 타파씨, 머노즈씨, 버즈라씨 이런 사람들은 떵떵거리면서 살지 않구요, 지금까지 그저 겨우 집 한 채를 가지고 있거나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정도지요. 어떤 이들은 포카라와 같은 관광지에 큰 집을 지어서 게스트하우스를 한다든가 음식점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사업도 그 나라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산 속에서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했다는 60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구제역 때문에 월급 없이 일 년을 살다, 5년 일 한 뒤 돌아왔다고 해요. 귀국 후 집 한 채 짓고, 원래 가지고 있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정도이지, 떵떵거리면서 사는 건 아니라고 봐요.


- 이주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아동노동문제를 말씀하셨는데 네팔에서 노동을 하는 아이들이 보통 몇 살 정도 되고 어떤 일을 합니까? 또 어떤 대우를 받고 있죠?


▶ 제가 2005년에 카트만두 외곽에서 아동 노동하는 어린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전시 하는 자리에 갔었어요. 그 전시회를 주관한 우리 활동가들을 통해 11개 지역(district)의 아동노동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 때 들은 사례들이, 6~7살짜리 아이가 높은 카스트의 집에 살면서 또래인 주인 집 아이가 학교 갈 때 가방을 들어다 주고 돌아와 잔심부름을 한다는 거예요. 자신은 학교에 다니 못하는 거죠. 가사노동을 하는 거니까요. 말하자면 그 집의 노예나 마찬가지겠죠. 저의 책에도 썼지만 11개 지역에 아동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장학금이 시작된 거예요. 그 아이들 대부분은 돌을 깨는 일을 했어요. 어른들이 강에서 돌을 채취하여 자갈을 만들어 파는 것인데, 부모들 옆에서 아이들도 같이 돌을 깨는 거였죠. 학교를 가지 못 하였구요.


네팔은 벽돌을 흙으로 빚어 굽는데 그 벽돌 만드는 일도, 전통가옥 외벽에 빨간 진흙을 바르는 일, 작은 마이크로버스인 템포의 차장, 가정부, 찻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일이 주요 아동노동형태이구요. 농사일에도 아동들이 일을 하죠.


여태까지 아동노동자들을 위한 많은 캠페인이 네팔에서도 전개 되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번 지진으로 인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10~12살이나 될까 하는 아이들이 버스 차장을 하고 있어서 아동들이 지진으로 위험에 많이 노출됐다고 볼 수 있죠.


- 19세기 이후로 보이던 아동노동, 지금 남미에서 진행되는 아동노동이 지금 네팔에서도 진행되고 있군요.


▶ 네, 남아시아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 카펫이나 주로 높은 카스트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데 많이 동원되는 건가요?


▶ 카펫은 외국 관광객들이 주요 수요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얼마 전에 카펫 공장을 가봤는데 어른들 사이사이에 아이들이 끼어서 노동을 하고 있었어요. 작은 손이 더 쓰임새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썼다고 하지만 그건 말하자면 불법행위죠.


- 네팔의 주요 종교가 힌두교인데 힌두교에서는 아동노동에 대해서 어떤 입장입니까?


▶ 힌두교에 대해 깊이 아는 바는 없지만, 제가 겪은 바에 의하면 힌두교는 카스트제도와 나란히 가고 있잖아요. 힌두교란 종교에서도 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금욕적인 수행을 하고 선행이 권장 된다 하더라도 카스트제도를 옹호하는 한, 이 문제(아동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카스트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관습적으로 남아 낮은 카스트의 아이들에겐 뭐든지 일을 시켜도 된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함께 이 문제를 고쳐 나가자’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지요.


- 그렇군요. 그럼 주제를 바꿔서 네팔에도 기후변화가 있습니까?


▶ 기후변화가 정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죠. 왜냐하면 히말라야에 눈이 언제까지 있을지..... 눈이 녹고 있으니까요. 장학금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상대 단체가 노조에요. 노조위원장이 기후변화관련국제회의에 자주 다녔어요. 왜? 눈이 녹으면 포터들 일자리가 없어지고, 관광과 관련된 수많은 일자리들을 잃는 거예요. 네팔이란 나라의 브랜드가 히말라야라서 기후변화를 그냥 두고 볼 순 없죠.


- 홍수도 납니까?


▶ 우기에 폭우가 쏟아지는 빈도가 잦은데, 보통의 우기 때의 현상과는 다르다고 해요. 겨울철 건기에도 비가 내리는 등 이상한 현상들이 있죠.


- 그럼 기후변화가 지진문제에도 영향을 끼치겠군요?


▶ 지진은 다른 것 같아요. 지진은 예측도 불가능하구요, 지구의 기후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지구가 아직도 생성되는 과정에서 판들이 움직여서 생기는 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이번 지진은 1930년대 초에 일어나고 80년 만에 일어난 지진이라고 했어요. 몇 년 전부터 제가 네팔에 갈 때마다 언제 한번 지진이 크게 올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가자마자 지진이 왔으니, 들었어도 전혀 생각을 못 했죠.


- 이번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 80년 전 사진을 봤는데 그때 못지않게 중요한 문화재, 사찰, 공공시설 등이 많이 훼손되고 파괴됐어요. 네팔의 일반 농가, 전통가옥들은… 아까 말한 아동들이 만든 벽돌로 지은 전통가옥 있잖아요? 진흙 벽돌을 두껍게 쌓았는데도 그 가옥들이 폭삭 주저앉았어요. 시멘트를 많이 쓴 집들은 금이 간 것 말고는 괜찮았지만요. 시골의 오래된 농가들이 많이 주저앉았죠.


제가 긴급구호를 위해 고르카, 누와콧, 박타푸르, 랄릿푸르, 카트만두, 다딩, 돌라카와 같은 지역을 방문했는데 진앙지에서 가까운 곳의 산간 마을엔 가옥이 거의 다 무너졌어요. 사망자도 9,000명에 가깝고 부상자도 2만 명 이상이구요.


- 특히 학교, 종교, 문화재가 많이 파괴됐죠?


▶ 학교가 많이 파괴됐어요. 그리고 박타푸르, 파탄, 카트만두에 있는 옛 말라 왕조 시대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파괴돼서 너무 안타까워요.


- 여기에서 일하실 때 재원은 어디서 많이 지원해주나요?


▶ 2000년에 귀국한 네팔사람들이 학교를 시작할 당시에 복지관 관장이었어요. 그때 우리 기관에서 봉사했던 분을 연결해 줬어요. 제가 하는 일은 정말 ‘연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어떤 일을 한다는 건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필요한 곳으로 연결한다는 의미에요. 그거에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연결일 뿐이죠.


요즈음 일이라 함은 돈을 낸 사람이 한 건지, 연결한 사람이 한 건지, 학교를 지은 사람이 한 건지, 아니면 거기서 조직한 사람이 한 건지… 정말 모두가 합심해야 이뤄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다 같이 하는 거죠. ‘내가’ 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촌스러운 일이 되죠.


모두가 함께 하는 거고 공동의 성과라고 생각해야 돼요. 확실히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사회교리의 원리들 있잖아요. 공동선의 원리, 인간존엄성의 원리, 참여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이 원리들이 활동의 근간이자 지침이라고 봐요.


그렇게 연결이 되어 시작이 됐어요. 후원자들은 우선 저의 지인들이 많구요, 또 지인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후원자가 되신 모르는 분들도 있구요, 그리고 현대 사회엔 재단들이 많이 있잖아요. 장학재단, 교회 여러 작은 기금들도 있어서 제가 조금만 애써서 제안서를 작성해서 내면 채택이 돼요.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이번 지진도 아는 분들이 신속하게 참여해주신 결과로 긴급구호가 이뤄진 거죠.


- 먼지 때문에 병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이 먼지가 네팔과 관련이 있습니까?


▶ 네팔은 건기에 먼지가 너무 심해요. 우기에도 비가 내린 후엔 공기는 조금 괜찮긴 하지만 대신 매연이 심해요. 저개발국가의 문제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쓰다만 폐차를 사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 차들에서 나오는 매연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또 기술이 아직 좋지 않아서 그런지 석유, 가솔린 같은 연료들의 연소가 불안정하죠. 매연, 연기, 먼지 이 세 가지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요. 장학생들을 만나러 지방을 다닐 때 숙소에서 밤새 가래침 뱉어내는 소리에 잠을 못 잘 때도 있었어요. 그 나라 사람들의 건강에 굉장히 문제가 될 거예요.


- 환경문제의 일차 피해자는 가난한 사람들이군요.


▶ 2005년에 다딩으로 아이들의 겨울옷과 담요를 싸갖고 간 것도 기후변화 때문이었죠.

아가라 강변에 한파가 몰아닥쳤어요. 돌 깨는 노동자들이 천막을 치고 사는데 경험하지 못한 추위가 갑자기 닥치니 곤경을 겪게 되었죠. 이번 지진도 마찬가지에요. 지진 자체는 어떻게 보면 지구가 꿈틀거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인간의 지혜로 튼튼하게 집을 지으면 피해가 적을 수 있죠. 그런데 똑같은 상황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다 무너진 거예요. 자연재해나 재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 건 가난한 사람들, 아동들, 여성들이라고 봐야 돼요.


- 해방신학에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은 가난한 사람일뿐더러 여자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가난한 남자보다 가난한 여자가 더 힘들구요.


▶ 여성들이 가난한 건 사실이고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면 이건 틀림없이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는 거죠. 여성들이 고소득이 보장된 자리에 갈 수 없다던가, 결정권을 가진 지도력에 배제된다던가, 아니면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일을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일의 성과 만큼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건 차별적인 환경이 그 원인이라고 봐요.


- 선생님 개인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선생님 신앙에 변화가 생겼나요?


▶ 제가 복지관 관장일 당시 만났던 네팔노동자들이 주로 일용직 노동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일용직 노동은 매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었기에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남을 돕는 데 쓸 수 있는 거예요. 자신의 시간을 없는 사람을 위해 썼던 사람들이죠.


저는 사람을 판단할 때 ‘저 사람은 자신이 가진 돈과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는가’를 봐요. 내 주머니도 열고, 나도 직접 참여하고 기여할 줄 아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 돈만 끌어다 쓰려 하는가. 이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네팔인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훌륭하다, 빈손으로 돌아가니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순 없을까 그런 인간적인 연민으로 시작했죠. 15년째 네팔에 다니며 활동을 하고 있는데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여정이었다고 봐요. 형편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네팔인들을 보면서 ‘이들과 하느님은 어떤 관계일까’ ‘이들에게 신은 어떤 존재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2000년 전의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분은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내 활동의 경험을 해석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가능하도록 학문으로 잘 다듬어 구조화해서 전해주기 위해 교회라는 집단이 만들어진 거잖아요. 이렇게 이어진 2000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 게 신학 공부였는데 정말 고마워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인격이 성장하듯이, 교회도 하나의 인격체처럼 다가오는 것 같음을 신학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요. 신학공부를 통해서 제가 했던 활동에 대해 재해석할 수 있게 됐고, 내가 활동 중에 갖게 된 의문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또 네팔에서 경험한 것들로 가톨릭과 힌두교의 차이는 무엇일까도 생각하게 되었어요.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인격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 계시로 내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힘의 실체를 알게 되어 제게 신학 공부는 큰 영향을 주었어요. 너무 좋고 고마워요.


자신감 없는 아이들,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낮은 카스트의 아이들에게 어떤 생명의 힘이 있다는 걸 느끼고 감지할 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영적인 감수성은 교회 안에서 전해져 내려온 신학적인 영성의 힘을 통해 왔다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신 거군요. 예수님은 선생님에게 어떤 분으로 느껴집니까?


▶ 지금 신앙고백을 하자면 ‘난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다’란 확신이죠. 신학 공부와 활동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갖게 된 정체성이라고 보아요. 저는 사랑받는 제자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때때로 제 연인이라고 생각해서 이 길은 연인과 함께 걷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신학 공부 전에는 머리로만 깊은 믿음을 갖는 다는 게 뭘까 하고 많이 궁금해만 했죠. 그 갈증이 교회 전통에서 빛나는 영성가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대화를 했을까 찾도록 했죠.


그럴수록 제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통로로 나갈 수 있다는 것과 그 통로를 통해 예수님이 저와 함께 걷고 계심을 깨달았어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수용했을 때 묵주기도 한 단, 한 단이 깊게 다가오게 되고 성모님의 행보나 어머님의 공경이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거였어요. 예수님 발치에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내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2000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신앙을 위해 제 자신을 닦지 않으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신앙이란 걸 알고 늘 주의하죠.


- 체험의 장을 어떻게 확인하신 건가요?


▶ 네팔에서 긴급구호를 할 때 도시 빈민 여성들이 물품을 받으러 왔을 때예요. 네팔은 어디서, 무얼 하든지 인사말이 중요해서 정말 정성들여 해야 돼요. 짧게 하는 것도 아주 실례에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우리 장학생들에게 인권, 권리로 접근했다면 신학 공부 이후, 특히 이냐시오 영신 수련 한 달 피정을 한 이후로 ‘우리가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 선생님이 저를 환대하기 위해 제게 주스 한잔을 주셨듯이, 우리도 지진 피해 여성들에게 함께 있음을 표현하는 것, 사랑을 표시하려면 뭔가 구체적인 것으로 해야 하지요. 그 무엇이 바로 우리가 마련한 텐트, 쌀, 매트리스, 담요라는 물건들이죠.


물품을 받으러 오신 분들에게 인사말을 할 때 저는 우리(한국인)가 표현한 사랑의 표시인 이 물건들을 받으러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 했어요. 그런데 인사말을 하는 중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일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와서 듣고 있는 거예요. 전 말을 할 때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거든요. 지진 피해 여성들의 눈빛과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저의 인사말이 끝나자 구호품을 받으러 온 여성들이 나마스떼(두 손을 모으고 하는 네팔 인사말) 하면서 ‘이 사랑의 표시를 우리가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긴급구호를 같이 해 오던 이들이 구호품을 전달 한 후 조용히 창고로 다시 가더니 다음 장소로 가야 할 구호물품을 정리하는 데 그 모습이 너무 평온 한 거예요. 그 순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복음의 장면들이 통째로 들어왔어요. 네팔 활동가들이 그 순간 예수님의 제자들로 보였어요. 장거리 구호를 다녀야 했기에 어려움도 많았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일하는 그 현장에서 본 평온함은 아주 특별하고 신비로운 체험이었어요!


신학 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또 연민과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건지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죠. 교회의 영적스승들로부터 받은 영감의 힘이 마음으로 인사말을 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가톨릭교회에 정말 감사해요


- 선생님의 신앙 증언을 듣는 저도 신나고 기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앙은 교회가 수많은 전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온 신앙의 보물창고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이냐시오든 프란치스코든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사랑이나 진리는 구체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신앙의 기쁨을 주로 말씀하셨는데 혹시 신학을 공부하고 활동을 하시면서 아직 풀리지 않는 고뇌를 느낀 일은 없으십니까?


▶ 많아요, 간혹 혼란을 겪게 되죠. 저는 제 자신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난 도대체 뭘 원하길래 다른 사람들이 만족 해 하며 누리는 것에 만족을 못 하는가. 어째서 인간적인 것들에서 흡족함을 갖지 못하는지 저 자신이 궁금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영성가들을 만나면서 찾게 되었고 알게 됐죠.


제가 혼란에 빠졌던 건 인간과의 일치를 이뤄야 하느님과도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구상에서 만난 인간들과 일치를 이루고 싶었어요. 일을 같이 할 때도 혼연일체가 돼서 일하기를 바랐죠. 영적인 자문을 받는 분께 말했더니, ‘인간과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있어야만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셔서 해방이 됐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스타일도 다르고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합리적인 기준, 절차, 방법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지, 동료들과 내적인 일치를 갈망하는 게 아닌데 제가 오랫동안 일치를 너무 갈구했던 것 같아요. 아가서에서 말하는 연인과의 일치가 하느님과의 일치인데 인간과 이루려 했으니 혼란과 방황이 있었죠.


- 선생님의 체험을 존중합니다. 우리 가톨릭신학에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먼저 하고 인간과 일치하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 방법이 없으므로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 그래서 우리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있어요.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신비로 머무르는 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과의 가까워짐을 통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에요.


▶ 전 그렇게 혼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혼란을 겪었던 과정을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안양에서 기관 대표를 했을 때도 그 후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하느님나라가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현장에서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마음 안에 연결의 끈이 튼튼하면 얼마 좋을까 하는 내적 갈망이 아주 강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늘 방황도 하고 좌절도 했지만 그런 방황과 좌절과 노력, 열망이 있어서 하느님을 더 갈망했던 것 같아요.


인간과의 일치를 이루지 않고도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는 동력자로 서로 같이 걸어가고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동료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그렇게 노력하면서 친분을 쌓아 온 분들이 저를 신뢰하고 긴급구호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구호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어요. 신비는 다른 신비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경험의 이끌림에 너무 빠져서 ‘난 이러니까 이렇게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죠. 구호 활동이 끝나면 네팔에 올 때 하고자 했던 길로 묵묵히 가야 되는 거예요. 우기가 끝나고 학교를 짓고 나면 트라우마 치료, 교육훈련을 하면서 이주하고 있는 여성들, 인신매매에 노출된 여성들과 아동 인권을 위해 계속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길로 툭툭 털고 가야 돼요.


고통과 좌절의 시간도 때가 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음을 지나야만, 겪어야만 아는 것 같아요. 공부도, 지나온 내 행동에 대한 해석도, 다시 앞으로 가기 위함이지 과거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길은 가는 것은 끝이 없는 길 같아요.


- AFI(국제가톨릭형제회)가 어떤 단체인지 가톨릭프레스 독자들을 위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보며 기뻐했잖아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믿음을 두고 인간들이 자유와 해방을 갖도록 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AFI들이에요. 그 활동이란 것은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죠.


실현의 장은 종교, 국경, 나라, 언어,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 넘어서는 것이에요. 우주성이 중요한데, 경계를 넘어 현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AFI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 같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머물러있다면, 내 옆에 있는 타자가 겪고 있는 고통에 침묵하지 않고 그 고통과 어려움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죠. 그것을 평생 동안 하느님 안에서 하겠다고 상호서약을 하는 사람들이 AFI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우리들의 기본 정신을 나타낸 말이 전진상(全眞常)인데, ‘全’은 온전히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해요.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내 에고를 부수고 에고에서 나온 것들을 포기해야 되는 거잖아요. ‘眞’은 온전한 포기 혹은 봉헌이 진실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말 이예요.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결과로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거죠. 그게 ‘常’이에요. 진실로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내 에고를 깨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게 되겠죠. 그것이 우리들의 최고의 이상이에요.


전진상이라는 이 세 글자가 형용사인데요, 온전 ‘전’, 참 ‘진’, 항상 ‘상’. 사랑은 누구나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포기도 적당히 할 수 있고 기쁨도 가끔 있을 수 있으나 전진상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온전히 포기하기 힘들고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기 너무 힘들고 항상 슬퍼도 고통스러워도 내 안에 기쁨이 자리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거잖아요. 우리의 이 세 가지 표어는 평생 우리를 닦도록 하는 채찍이에요.


-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올해 네팔에 간 게 4월 13일 인데, 2014년 4월에 인신매매와 이주와 관련된 국제회의를 네팔에서 주관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다시는 네팔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돌아왔어요. 국내에서 해 오던 교육과 훈련과 상담을 하며 살아야지 했는데 여기 있다 보니 신학 공부도 더 하고 싶어지고 그러자니 박사과정을 할까, 아님 다른 걸 더 해볼까 하면서 계속 공부에 자꾸 집착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유혹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육신의 힘이 있을 때, 더 건강할 때, 가난한 나라로 가서 활동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든 거예요. 그래서 다시 가게 됐어요. 새로운 선택이었죠. 새로운 선택을 하고 갈 때 교황의 ‘복음의 기쁨’, ‘공의회 문헌’, 가톨릭교회 교리서 그리고 신비주의에 관련된 책과 성서를 들고 갔어요.


복음의 기쁨을 수차례 읽으면서 활동의 지침으로 삼자 했구요, AFI로서 전진상을 살아야 한다면 그 시대를 살라는 게 우리 AFI들의 모토인데, 그 시대를 살아가려면 복음을 근간으로 작성된 교회의 지침이 필요한데, 즉 교황님의 회칙이 제일이잖아요.


전 사회교리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복음의 기쁨이 제 활동을 위한 새 지침이라 생각하고 그런 지침을 주신 교황님을 위해 미사 때마다 기도하고 감사하게 돼요. 우리 단체를 창립하고 영성을 전해준 인물들의 문헌도 있지만 창립자의 지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협조자라고 생각해요.


바깥으로 나가서 가난한 이들을 만나 그 기쁨을 전하라! 기쁨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활동의 지침을 주신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라 보고 그 분의 협력자가 되고 싶어요. 제가 감히 그 분을 평가할 수 없고요 그저 복음의 기쁨을 통해 그 분을 만나게 되니 감사해요.


- 오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가톨릭프레스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회가 현장이다’라는 분위기가 오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현장이 교회’라는 거죠. 현장 안에 교회가 있다는 건 엄청난 전환입니다.


▶ 아, 생각나는 게 있어요. 몇 해 전 크리스마스 때였어요. 네팔 친구들과 고된 일을 하고 난 뒤 함께 먹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 차려놓았고 우리는 다 같이 음식을 중심에 놓고 둘러앉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 왠지 함께 기도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인 거예요. 그 자리에 있던 힌두교도들인 네팔 사람들도 그걸 동시에 느꼈는지 저보고 기도를 해 달라고 했어요. 힌두교가 좋은 게 관용이죠. 그들은 다른 종교 방식을 잘 포용해요. 그래서 제가 가톨릭 기도를 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비록 종교는 달라도 신께 함께 감사를 드리는 ‘여기가 현장이고 교회고, 여기서 음식을 나누는 것이 성찬’이라는 거였어요. 마지막 말씀이 너무 좋아서 생각이 났어요.


- 하하, 그렇군요. 정말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필진정보]
이금연 : AFI(국제가톨릭형제회) 네팔 활동가이다. 2005년 '아시아 어린이와 함께'라는 단체를 만들어 아시아 어린이들이 아동노동에 노출되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힘 썼다. 2011년 한국인권재단이 수여하는 '인권홀씨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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