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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 문미정, 강재선
  • moon@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8-10-30 16:29:07
  • 수정 2018-11-02 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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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서울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서 가난한 이들의 야전병원이 되어준 ‘막달레나의 집’(현재 막달레나 공동체). 막달레나의 집 공동 설립자인 이옥정 전 대표와 문애현 수녀(Jean Maloney, 메리놀수녀회)는 이웃인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기적 같은 삶’이라고 추억했다. 


서울 가양동 메리놀수녀회에서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의 첫 만남부터,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기까지의 일들을 들어보았다. - 편집자주


▲ 이옥정 전 대표와 문애현 수녀 ⓒ 강재선


막달레나의 집을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헌신하셨는데, ‘막달레나 공동체’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 이옥정 전 대표(이하 이옥정) : ‘막달레나 집’을 시작하기 전부터 용산에 살면서 성매매 여성들을 지켜볼 수 있었고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하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제가 보험판매원을 하고 있었는데, 상담을 하면서 용산역 앞에 방을 얻어 살았죠. 그렇게 2년 동안 상담을 하던 중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를 통해 문애현 수녀님을 만나게 됐어요. 


1984년에 아몰(AMOR, 아시아 오세아니아 수녀연합회) 수녀님들이 회의를 준비하시면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문 수녀님과 다른 수녀님 몇 분이 평신도 혼자 사는 집에 오셨어요. 


저와 수녀님들은 현장에 있는 집 몇 군데를 방문했는데, 그 중에는 제 묵주반지를 보고 자기도 천주교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현장에 있는 친구들이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는데 이후에 문 수녀님께서 저에게 연락을 하셨어요. 


사실 외국 수녀님이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좀 당황했죠. 솔직히 말하면 부담도 되고 거부감도 들었어요. 아무리 수녀라도 외국 사람인데, 이 사람에게 우리나라의 아픈 곳, 부끄러운 곳을 보여줘야 하나…. 당황스럽긴 했어도 하느님도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어요. 


1985년에 용산역 부근 조그만 식당이 있는 건물 2층에 방을 얻고 ‘막달레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막달레나’를 죄 많은 여인, ‘창녀’라고 알고 있잖아요. 우리는 그보다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고, 예수님을 공경했던 ‘성녀’, 용감한 성녀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따왔어요. 


수녀님은 왜 ‘막달레나의 집’과 함께 하시기로 했나요?


- 문애현 수녀(이하 문애현) : 막달레나의 집에 오기 전에 부산 메리놀병원에 있었어요. 그때 저는 아몰 회합을 준비하고 있었고, 여러 현장교육에도 참여했어요. 아주 열심히 일하는 평신도가 용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여성위원회 수녀 5명과 함께 (이 전 대표의 집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듣게 됐죠. 


내가 외국 사람이라 어렵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저는 오히려 그때 부산 메리놀병원을 그만두고 같이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특별히 계획한 것은 없었고,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아프면 병원에 함께 가주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수녀원에서도 무슨 일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겠다. 가봐야 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이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용산’에 뿌리를 내렸다. 


▲ (사진출처=막달레나 공동체)


‘막달레나의 집’ 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현장 활동은 어땠나요?


- 이옥정 : 사람들이 수녀님을 잘 따랐고 외국 사람이라 잘해주기도 했어요. 여성들 집에 방문하면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하면서 뭘 자꾸 사줬는데 처음에는 수녀님이 안 드시려고 했어요. 우리에게 뭐 하나를 사주려면 자기 몸을 팔아야 하니까, 수녀님은 ‘내가 이걸 먹으면 저 사람이 또 고생을 하는 구나’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당시에 수녀님 한국말이 서툴러서 (말을 돌려서 못하고) “안 먹겠어요”라고 하니까, 상대방은 ‘내가 몸 파는 여자니까 내가 준 게 더러워서 안 먹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집에 돌아와서 수녀님께 다 받아서 드셔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대신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주자고 했어요. 내복이 없는 것 같으면 내복을 사다주고, 담배 피는 사람한테는 담배를 사줬어요. ‘내가 얻어먹어서 사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내복 줬는데 난 이 색 안 입어’라든가 ‘담배도 안 피는데 누가 담배를 주네. 너 펴라’ 하는 식으로 건네줬어요. 


그리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그때만 해도 국민건강보험이 지금처럼 잘 되어있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거주지 안에서만 가능했거든요. 우리가 요셉병원, 도티병원, 성가복지병원에 데리고 가서 무료 진료를 받게 했어요. 


사람들이 참 많이 죽기도 했는데…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부정 탄다고 안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고 벽제화장터에서 단골이라고 할 정도로 장례전문가가 됐어요. 


당시에는 업주, 건달들도 가난했어요. 다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어요. 사람 가리지 않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했던 곳은 다 쫓아다녔어요. 힘든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죽었을 때는 같이 울어주고 우는 사람 눈물 닦아주려고 했어요. 그렇게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어요.


- 문애현 : (이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는 경우도 많았어요. 


- 이옥정 : 신분증이 없으니 직장을 잘 얻지 못했어요. 식당일을 하려고 해도 보건증을 만들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위생 조사 나오면 숨어 있어야 하고, 결국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어떤 사람은 브로커 통해서 신분증을 만들려다 돈만 날린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들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어줬어요. 어릴 때 가출해서 호적이 없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서 선거도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방법을 찾아 호적도 만들어주고, 가족도 찾아줬어요. 


- 문애현 : (그들이) 선거 처음 할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 이옥정 : 최근에는 임대아파트 분양 받는 방법을 알려줘서 많이 보내기도 했어요. 주거가 보장돼야 그 일도 안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집이 생기니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해요. 식탁도 선물로 주고 신부님이 집도 축성해주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것


현재도 ‘멀쩡한 사람이 왜 몸을 파느냐’라면서 성매매 여성들을 배척하고,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이 여전한데요. 현장에서 직접 부대끼면서 겪은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 이옥정 : 사람마다 자기만의 역사를 갖고 있어요. 그 역사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죠.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일 수 있지만 성장 과정을 보면 한 부모 가정, 이혼, 친족 성폭력 등 그 사람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요. 


게다가 옛날에는 순결을 중요시해서 한번 몸을 팔면 끝난 여성이라고 단정 지어서, 집에도 갈 수 없고 떠돌다가 결국 다시 성매매 현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곳도 아니었거든요. 성매매를 해야만 할 정도로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 문애현 : 안타까워도 일을 그만두고 나오라는 말을 하지 못 했어요. 한편으로는 제가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한 거였나, 말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갈등이 많았어요.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 했죠. 


- 이옥정 : 만약 우리가 일을 그만두라고 했으면 거부감 때문에 우리를 안 만났을 거예요. ‘고생 좀 그만 하면 안 될까’ ‘빚을 다 갚았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아프면 우리 집에 와서 쉬어’ 이렇게 말해요. 우리 집에 한번 오던 애가 두 번 오고, 그러다가 일을 그만 두고… 우린 그걸 기회로 만들어주는 거죠.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탈성매매에 성공한다 한들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에요?”라고 말하셨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이옥정 : ‘탈성매매’ 했다고 성공한 건 아니에요. 우리는 성공을 탈성매매에 두지 않아요. 이들이 얼마나 평화롭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성매매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막달레나의 집’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해요. 탈성매매를 했더라도 매일 괴로워하고 악몽을 꾸고 평화롭지 않다면 성공한 삶이 아닌 거죠. 성매매를 하든 안하든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탈성매매가 곧 해법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 이옥정 : 탈성매매는 해야죠. 다만,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고 아무런 빛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만두라고 현장에서 끌어내도 이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성매매는 나쁘니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만둘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거예요. 


이 집에서 얼마나 살고 갔든 현장에 돌아갔으니 실패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하느님이 여기에 한번 던져놓으셨으니 ‘다시 또 보내주시겠지’ 해요. 한 번도 안 온 사람보다는 탈성매매를 훨씬 빠르게 할 수 있어요.


- 문애현 : ‘할 수 있다’는 마음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돼요. ‘Little girl, get up!’ 우리가 도와주더라도 자기 힘으로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부터 사랑해야 해요. 자꾸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상황 때문에 이런 생활을 하지만 조금씩 배워 나가면서 힘을 얻고, 혼자 있기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 해요. 


- 이옥정 : 사람들은 우리가 베풀었다고만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우리는 나눈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많이 받고 살아요. 사람들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도를 해줘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희생하고 봉사했네’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위도 아래도 없는 ‘둥근 밥상’


▲ 1994년 용산가족공원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한 막달레나의 집. (사진출처=막달레나 공동체)


선생님 관련 보도를 찾아보니 제일 눈에 띄는 것이 ‘큰언니’라는 호칭과 ‘밥’, ‘공동체’였습니다. 


- 이옥정 : 상대방을 잘 알아야 그 사람의 아픔이 뭔지 알게 돼요. 그렇지만 ‘원장’, ‘선생님’은 거부감이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큰언니’라고 했어요. 언니에게는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잖아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들어줘요. 옛날에 뭐했는지, 어떻게 막달레나의 집에 오게 됐는지 묻지 않아요.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들어줄 뿐이에요. 


서로 잘 지내려면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해야 돼요. ‘싸우다보면 네 얘기가 나올 거고, 말하고 싶을 때 언제든 해라. 난 언제든 들어줄 생각이 있다’고 말해줘요. 


막달레나의 집에서 ‘밥’은 어떤 의미였고, 공동체 생활은 어땠나요? 


- 이옥정 : 우리 집에 있는 동안에는 최고의 밥을 해줬어요. 여성들이 업주들의 생계를 이어주는데도 업주들이 더럽다고 따로 앉아서 밥 먹고, 밥상에서 무시를 당했어요. 그래서 존중받는 생각이 들도록 밥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줬어요. 우리 밥상은 둥글어요.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평등하잖아요. 1987년도에 둥근 밥상을 마련했는데, 지금도 그 밥상이 우리 집 보물 1호에요.


새해에는 떡국을 끓여서 나눠줬어요. 근처 식당을 빌려서 준비해온 재료들로 떡국을 끓였는데, 남는 걸 주는 게 아니라 정말 정성스럽게 해주는 걸 보고 고마워했어요. 그러면 식당에 음료수 박스가 잔뜩 쌓였어요.


한번은 호객하는 친구들이 먹고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그 사람들이 ‘얻어먹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쟁반을 들고 집집마다 나눠줬어요. 그릇을 수거해올 때 보니까 돈이 있기도 하고, 차를 대접해주기도 했어요.


이렇게 하니까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에서 맛있는 것을 나눠주는 느낌이었어요. 마치 동네잔치 같았어요. 그 사람들이 주는 것을 기꺼이 받고 우리도 주면서 격 없는 사이가 됐어요.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아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 인식이 안 좋은 게 힘들었지 우리는 이들과 살면서 힘든 적은 없었어요. 수녀님과 옛날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지나고 나니까 같이 산 게 기적이고 은총이었어요. 


약자들의 야전병원, ‘막달레나의 집’


▲ ⓒ 문미정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야 하며, 야전병원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막달레나의 집’을 보면 야전병원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야전병원 영성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 이옥정 : 저는 가해자,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아요. 창세기에 나왔듯이 하느님께서는 모두 똑같이 창조하셨어요. 하느님 모상대로 만들어내신 거예요. 그 사람 삶의 과정이고, 사회가 이렇다보니 자기도 그렇게 된 거죠.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 선이 눌려있어서 그렇지 그들에게도 선은 있어요. 애초에 하느님이 나쁜 사람을 만들지 않았을 거라 믿고 저는 그 선함을 끌어올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다보니 업주들도 많이 변했어요. 업주 한 사람을 바꿔놓으면 그 집에 있는 여성들을 다 바꿔놓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성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게 하느님의 뜻일 거예요. 하느님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내겠어요. 


- 문애현 : 서로 용서해줘야 돼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시련이 있으셨을 텐데, 어디에서 위로를 받으셨나요?


- 이옥정 : 가장 힘들었을 때는 수녀님이 그만두고 떠나셨을 때에요. 둘이 같이 있어야 힘이 생기는데, 힘이 하나 없어진 거죠. 


당시에는 심지어 성매매 관련해서 후원금 하나도 없었는데, 돈이 안 들어오는 것보다 평신도가 한다고 하니 평신도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좌절하고 회의감이 들었어요. 그러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났어요. 힘들 때 하느님께서는 아이들을 통해 힘을 주신 거예요. 


저도 힘들다고 떠나버리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에 있는 애가 전화를 해서 ‘큰언니 건강하세요, 아프지 마세요’.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큰 힘이 났는지 몰라요.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평신도에게도 밥을 주는 세상이 됐어요. 


처음부터 기적의 삶이었어요. 작든 크든. 기적적인 삶 때문에 버텼어요. 하느님이 나를 붙들어주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어요. 기적을 보게 하면서 내가 못 떠나게... 사실 떠나려고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떤 일이 하나씩 생겼어요. 하나씩 해결하다보면 잘 되기도 했고요. 


또,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때 힘들었어요. 그것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고, 그 사람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같이 살아서 애들의 아픔을 알지만 그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어요. 


대표님과 수녀님, 두 분 사이는 매우 각별해 보입니다. 


- 이옥정 : 수녀님과 저는 ‘환상의 콤비’였어요. 사람들도 수녀님하면 저를 묶어서 생각하고 큰 언니하면 수녀님을 묶어서 생각했어요. 수녀님 안 계실 때는 저한테 수녀님 언제 오시냐고 물어봐요.


- 문애현 : 저한테는 큰언니 언제 오냐고 물었어요. (웃음)


- 이옥정 : 메리놀수녀회 정신이 한 사도직을 10년 이상 하지 않아요. 10년 있다가 떠나려고 하시는 걸 제가 잡아서 3년 더 하시고 떠나셨어요. 얼마동안은 보고서에 ‘원장 문애현 수녀, 총무 이옥정’ 이렇게 썼어요.(웃음)


우리 둘이 말을 나누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일치하는 일이 정말 많았어요. 하느님이 딱 맞게 연결시켜주신 것 같아요. 당신이 재밌으니 만나게 해주신 것 같아요. 


▲ 이옥정 전 대표 ⓒ 강재선


올해 2월에 막달레나공동체 대표직을 내려놓으셨지요.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장에서, 이웃들과 함께 하셨어요. 앞으로의 계획 있으신가요? 


- 이옥정 : 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현재 대표) 신부님 뒤에서 조용히 도우면서, 내가 가진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노년 여성들이 제게 상담 전화를 많이 해요. 큰언니라서 믿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는 거죠. 이들이 잘 살고,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버킷리스트도 함께 만들고 싶어요. 제 청력이 살아있는 한 받아줄 거예요. 또, 성매매 여성들이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악몽을 꿔요. 치매에 걸려 가족들에게 성매매 얘기를 할까봐 걱정하는 여성들도 있어요. 이런 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어요.


사실 처음에는 그만두고 ‘새 삶을 살아봐야지’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저를 대표님이라고 불러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막달레나의 집’이에요. 그 역할을 제가 하고 싶어요. 수녀님이 떠나신 후에도 뒤에서 보탬이 되어주셨던 것처럼요. 


- 문애현 : 사실 저는 수녀라서 집 걱정도 없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조금 부끄러워요. 지금은 건강하고 괜찮아요. 한국에서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 제 동생에게 병이 생겨서 걱정되는데 이번 휴가 때 가서 같이 있을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이옥정 : 사랑은 생각났을 때 즉시 해야 돼요. 절대로 미루면 안 돼요. 많은 죽음을 보면서 후회를 많이 했어요. ‘진즉에 잘할 걸, 그 때 왜 미뤘을까….’ 한 번 더 만나고, 한 번 더 밥 먹을 걸. 그 사람이 언제까지고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거죠. 


- 문애현 : 처음에는 용산에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다 이웃사람이 됐어요. 서로 나누고 들어주고 행복하고 걱정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어요. 하느님이 그 가운데 계시니까 조금 했는데도 생각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 많이 봤어요. 기적이에요. 서로 믿고 함께 하고 용서해주고 행복했어요. 



막달레나의 집이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과 함께 한 여정을 짧은 시간에 모두 담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큰언니 이옥정 전 대표와 문애현 수녀는 그 여정을 ‘재밌게 잘 놀았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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