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의 시제가 과거일까 현재일까 미래일까? ‘사랑했다’ 또는 ‘사랑할 것이다’는 표현은 왠지 ‘사랑’이라는 정의와 어긋나 보인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다고 생각(또는 착각)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랑은 무시간성이라고 정의한다. ‘순간’과 ‘영원’, ‘지속’과 ‘단절’ 등의 시간과 관련된 용어들이 사랑이라는 범주에서는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도(程度)는 사랑을 진행한 수학적 시간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단 하루의 만남이지만 영원한 시간을 지속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을 만나 사랑한다고 속삭였지만 불현듯 우리의 사랑이 가볍다고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직 적합한 해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수학적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으려 한다.
사랑이 다분히 공간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따라 식는 경우가 다반사다.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낸 여성(골리)과 이란의 작은 마을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남성(파하드) 사이에 공간적인 간극은 너무도 크다. 공간의 격리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사라지게 만들고 순식간에 성인의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시간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20년은 무수한 조각들로 이루어진 파편화된 시간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다른 이에게 20년은 기억의 반복적 되새김으로 인해 조금의 일탈도 없는 일관된 순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랑 방정식의 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변수의 값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 변수의 관계식을 좀처럼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증명되어, 시간과 공간 값을 동시에 적용하여 방정식을 푸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 치명적으로 절망감을 갖게 만든다.
영화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2014)의 도발적인 제목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란의 강인한 색상을 골목 벽 사방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제 때에 꼭 맞춰 깔리는 음악은 영화의 매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결국 해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연습장만 잔뜩 어지럽혀 놓은 듯한 스토리 전개가 도리어 허접한 내 심장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