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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2 : 오천 명을 먹인 기적
  • 김근수
  • 등록 2016-08-09 10:18:44
  • 수정 2016-08-09 11: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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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베싸이다라는 마을로 가셨다. 11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를 뒤쫓아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기꺼이 맞아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시며 치료해야 할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12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근방 마을과 농촌으로 가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얻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13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시오.” 하셨다. 제자들은 “지금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어디 가서 이 모든 사람을 먹일 만한 음식을 사오라는 말씀이십니까?”하고 물었다. 14 거기에 모인 군중은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대충 오십 명씩 떼지어 앉히라고 하셨다.  

15 제자들이 분부하신 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히자 16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 17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아들였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0-17) 




빵의 기적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여섯 군데 있다. 사천명을 먹인 이야기(마르코 6,32-44; 마태오 14,13-21; 루카 9,10-17),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마르코 8,1-10; 마태오 15,32-39), 오천명 먹인 이야기(요한 6,1-15)다. 요한복음은 두 이야기를 한데 묶었다. 루카복음에서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빠졌다. 일곱 광주리가 이방인 교회를 뜻하기에 이방인 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루카에서 삭제된게 이상하다. 


오늘 이야기는 예전에는 불트만의 영향으로 ‘자연 기적’으로 분류되곤 했다.(Bultmann, Geschichte 230-) 그러나 요즘은 타이쎈의 영향으로 ‘선물 기적’으로 주로 분류되고 있다(Theissen, Urchristliche Wundergeschichten 111-). 사람들이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은 선물을 예수는 자청해서 하는 것이다. 마르코 6,30-44에 근거한 마태오 14,13-21과 함께 살펴볼 단락이다. 헤로데의 의문(루카 9,7-9)과 베드로의 고백(루카 9,20) 사이에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단락을 루카는 끼워 넣었다. 


사도들의 활동 보고와 오천 명을 먹인 예수의 빵 기적 두 이야기가 하나의 단락으로 쓰여졌 다. 빵 기적은 엘리사가 빵 20개로 백명을 배불리 먹인 일(열왕기하 4,42-44), 초대 공동체의 공동식사, 그리고 예수의 최후 만찬과 연결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난민 신세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주신 만나(탈출기 16,15), 메추라기(민수기 11, 31),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가 함께 했던 식사를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소개된 치유와 소생 이야기와 합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고백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사도들은(루카 6,13) 선교(루카 9,1-6)와 빵 나눔에서(루카 9.10-17)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코 6,31)는 루카에서 빠졌다. 그 대신 베싸이다라는 마을로 갔다고 보도되었다. 그곳은 시몬,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이다(요한 1,44). 갈릴래아 호수 북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동네다. 예수는 오천 명을 먹인 기적 뒤에 제자들을 베싸이다로 보낸다(마르코 6,45). 예수는 거기에서 소경을 고쳐주었다(마르코 8,22). 


11절에서 예수는 군중을 기꺼이 맞아들인다(루카 8,40). “바오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사도행전 28,30)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고 병자를 치료한 활동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주라’(루카 9,2)와 똑같다. 예수와 제자들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역사에서 예수가 했던 일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제자들은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군중의 잠자리와 먹을 것을(창세기 19,2; 24,23) 제자들이 걱정하는 구절은 루카에서 여기가 처음이다. 제자들은 군중이 각자 잠자리와 먹을 것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산시킬 것을 예수에게 조언하였다. 이런 제자들을 참모라고 데리고 다니는 예수가 불쌍하다. 그런 제자들을 직접 뽑았던 예수 책임이다. 


13절에서 예수는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시오”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였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 독자들은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부탁이다. 빵과 물고기는 주식이었다(요한 21,9).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한 제자들의 신세도 참 딱하다. 물고기 두 마리는 샌드위치 한 개 만들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양이다. 두 사람 한끼 몫도 안 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로 수십 명 제자들의 식사를 어떻게 감당할까. 예수 일행의 가난했던 실정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더구나 장정만도 오천 명이다.

 

14절과 15절에서 앉히다kataklinein는 눕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루카에만 등장한다(루카 7,36; 14,8; 24,30). 잔칫상 주위에 비스듬히 눕는 동작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군중이 예수와 함께 축제의 잔치를 맞이한다. 가난한 백성이 해방의 잔치를 벌인다는 구절이 신약성서에도 있다.  


군중을 오십 명씩 앉히라는 말은 초대 교회에서 공동식사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사도행전 2,46; 20,7). 16절 예수의 동작과 말은 가장의 역할에 해당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모습과 연결된다(코린토전서 11,23-25; 마르코 14,22-24). 예수는 식당 주인으로, 제자들은 서빙하는 알바생으로 보자. 식당이나 편의점 알바가 얼마나 고달픈가.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미사에 참여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얻기 어렵다. 시간당 최저임금이 얼마나 되는지 가톨릭 신학생들은 알까. 


16절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뒤에(시편 123,1-; 다니엘 4,31) 예수는 빵을 제자들에게 주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제자는 봉사하는 사람이고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돈과 명예를 노리는 종교인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다. 제자들의 의무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이다. 


제자들과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열왕기하 4,44).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작은 광주리가,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큰 광주리를 뜻하는 단어가 쓰였다. 열두 광주리는 이스라엘과 열두 제자들을 상징한다. 제자들의 반응(마르코 6,52), 군중의 반응(요한 6,14-)은 루카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이라는 말은 여성 군중과 여성 제자들을 제외한 숫자일까.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불리 먹었다는 말의 의미를 알까.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가난하게 유랑했던 동아리였다. 자기들 먹을 것도 부족하였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군중의 먹을 것을 염려하도록 가르쳤다. 가난한 교회가 가난한 군중을 보살피라는 뜻이겠다. 


예수는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제자들이 이제 어떻게 할지 독자들은 지켜보고 있다. 교회가 어떻게 할지, 성직자들이 어떻게 할지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성직자들에게 듣고 싶지만, 성직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실천하는지 사람들은 먼저 지켜보고 있다. 


사도들은(루카 6,13) 선교(루카 9,1-6)와 빵 나눔에서(루카 9.10-17)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제자들이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선교와 빵 나눔이다. 우선 교회부터 먹고 살 일이 아니다. 교회부터 살고 볼 일이 아니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야 한다. 그러면 교회도 살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야 비로소 교회가 산다. 교회부터 살고 그 다음에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는게 아니다. 


제자들은 “왜 저희가 저들을 먹여야 합니까? 저희 책임입니까? 각자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챙겨야 하지 않나요?“라고 예수에게 반문하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의무를, 마음을 오늘 교회는 헤아리고 있을까. 교회가 군중을 먹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할까. 오늘 교회는 이 구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 


신자들에게 돈을 걷어 자신의 생활을 대비하는 주교와 사제들은 신자들의 살림을 걱정해본 적 있을까. 교회는 신자들의 생계를 언제 한번 염려라도 해 보았을까. 노후 걱정하는 사제는 한국에 전혀 없지만, 노후 걱정하지 않는 신자들은 한국에 별로 없다. 굶어죽은 주교나 사제는 아직 없었다. 평신도들은? 


예수는 추상적, 종교적 생명을 다루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실제 배고픔을 먼저 염려했다. 예수는 스승이요 구원자 이전에 식탁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분이다. 말씀의 식탁이 아니라 실제 식탁에서 말이다. 제자들도 식탁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식탁이 아니라 실제 식탁에서 그래야 한다. 오늘 성직자들은 대접받는 사람인가 대접하는 사람인가. 성직자들이 봉사자보다 지배자로서 행세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는 경제 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큰 주제다. 하느님은 신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 쓰실 것이다. 가난은 경제 범주가 아니라 신학 범주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예수의 모습과 딱 맞다. 적어도 인류의 70 퍼센트를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외면하는 종교나 신학을 어디에 쓸까.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식탁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실제 식탁에 우선 신경써야 한다. 


빵을 엄청나게 많게 한 예수의 능력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감동에 젖은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의 능력에 집중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잊었던 경우가 많았다. 미사에서 최후의 만찬은 기억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의 식사를 잊으면 되겠는가. 예수를 잠시 잊는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예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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