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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눈부신 우리 가을이 ‘막간(幕間) 가을’이 되고 말다니
  • 전순란
  • 등록 2016-10-05 1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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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4일 화요일, 맑음


일주일 가까이 구물거리며 비만 내리더니 오늘 하루 반짝 가을하늘이 보인다. 내일 다시 태풍이 큰비를 몰고 온다니까 그야말로 눈부시게 푸른 한국의 청명한 계절이 ‘막간(幕間) 가을’이 되고 말았다. 빗방울에 축 처져 있던 살살이꽃(코스모스)과 들국화가 모처럼 고개를 들고 산들바람에 흔들거린다.



모처럼 날이 들자 아침부터 할 일이 머릿속을 맴돈다. 빨래도 해야 하고, 텃밭의 지심도 매야 하고, 무와 배추에 목초액도 뿌려야 하고, 엊그제 면사무소에서 가져다 준 패랭이꽃도 길가에 심어야 하고...


“농약이나 목초액은 언제 뿌리면 좋지?” 예전 같으면 귀농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묻는데 요즘엔 구글 검색을 한다. “모든 농약은 아침이슬이 마른 직후가 제일 좋다. 그런데 채소밭을 습격하는 벌레들은 해가 기운 저녁 무렵에 식사를 하므로, 저녁에 약을 뿌리면 걔네들이 늦저녁에 얼른 먹고 바로 뒈진다” 하지만 저녁까지 날씨가 맑다는 보장도 없어, 며칠 전 사다놓은 우박 걸음을 채소밭에 주고, 20킬로 약초액 통을 어깨에 메고서 무와 배추에 약을 뿌리고, 휴천재 올라오는 길가와 식당채 화단에 패랭이를 심고 나니 오전 반나절이 다 갔다.



성주 사는 정선생 부부가 산청 한방축제에 갔다가 들르겠다는 전활 했다. “오늘이 최근 들어 가장 바쁜 날입니다요.” “뭐가 그리 바쁜 데요?” 바쁜 사연을 줄줄이 주워대다 “텃밭 풀을 깎아야 하지만 오른팔 테니스엘보가 고장이어서 남편마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네요.” “그건 걱정 마쇼. 내가 예초기를 실어가서 깔끔히 처리해 주리다.”


정선생 부부는 산청에 들어 미루만 잠깐 보고서 ‘쌀로 만든 빵’을 한 봉지 사들고 휴천재로 달려 왔다. 지난 2월에 미루가 우리 따라 왜관 분도수도원에 함께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주에 들러 정선생댁에서 저녁을 먹은 적 있다. 정선생 부부가 그때 한번 본 미루를 격려해 주러 산청까지 갔으니 우리 ‘귀요미’의 매력이 덩어리째다.


정선생은 커피를 들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집에서는 예초기가 안중에도 없으면서도 남의 일에만 열심이다”는 율리에타씨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휴천재 뒤안길과 텃밭을 빙빙 돌며 시원하고 깔끔하고 솜씨 있게 풀을 깎았다. 보스코는 그 동안 버쩍 말라 서 있는 옥수숫대를 뽑아내고 두 고랑의 비닐을 걷어냈고, 추석 때까지도 크기가 탱자만 해서 배나무에 그냥 매달아 둔 배 여남은 개를 따들고 올라왔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구웠는데 ‘토종’으로 자란 입맛들이어서 예상처럼 반겨 먹지는 않았으나 아들 오면 준다기에 나머지는 싸 보냈다. 이 부부는 ‘우리밀살리기운동’으로 30년 넘게 함께 한 동지다. 남편이 농민운동으로 동서남북 뛰어다니는 길에 가야산 발치에서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우리밀농산’을 꾸준히 경영해 온 것은 아내의 수고였다.



‘사드반대’ 투쟁에 앞장섰을 부부에게 성주의 전황(戰況)을 물으니 주민들의 전의(戰意)가 대단하단다. 한나라당 당원들 1000여 명이 동시 탈당을 하고, 그 1000여 명이 동시 삭발을 하고, 애오라지 1번만 찍어대던 주민들이 두 달 넘게 매일 저녁 집회를 계속하고 때로는 서울역과 광화문 시위에도 다녀오는가 하면, 전에는 “아이고 우리 공주님, 애려서 양친 여의고 혼자 커서 얼매나 불쌍하노!”라는 가락만 읊어대던 ‘할마시’들도 “아하, 세월호 어미들과 강정 주민들과 밀양의 노인네들이 요로콤 당했구나!” 각성하기에 이르렀단다.


자기 발밑이 흔들리기까지는 세상 모르던 주민들이 저런 오싹한 불안으로, 자기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한테서 ‘종북좌빨’로, 자기네 군수한테서 ‘술이나 파는 것들’로 불리는 굴욕 속에서 조금이나마 사회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경주에 지진이 여진을 계속 흔들고 있어, 언제 집이 무너질지 모르고, 그래도 ‘돈 된다’고 경상도로 모조리 갖다 놓은 핵발전소가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터에, “안심하라! 지진 안 난다!” “안심하라! 핵발전소 끄떡없다!”는 정부의 방송이 헛소리임을 깨달아 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반쯤 넋이 나간 으시시한 나날을 겪다니....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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